[이민생활이야기] 고마워 하는 사람들과 나눈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송석춘(독자) = 1.4 후퇴때 우리 가족은 경북 김천 깡촌으로 피난을 갔다. 당시 14살이었던 나는, 깊은 산에 들어가서 땔감나무를 해다 놓고 다음날 새벽 별을 보면서 나뭇짐을 지고 집을 떠나 20리가 넘는 김천 야시장까지 걸어가 팔았다. 이렇게해서 얻은 돈은 우리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입이었다.
이때는 밤이면 빨치산의 보급투쟁이 있었고, 낮에는 한국 전투 경찰들이 와서 간밤에 마을사람 중 누가 빨치산에게 협조했는지 조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밤낮으로 이편 저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을 뿐 아니라, 보릿고개를 넘느라고 허리띠를 졸라 매야만 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아버님이 입맛이 없는 것 같다며 나무짐 판 돈에서 자반갈치 작은 것 두 마리만 사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날 장에 가서 생선 두마리를 사서 지푸라기로 묶어 지게에 매달고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잡수시고 남긴 자반 갈치 꽁지와 대가리 그리고 뼈를 칼로 다져서 막장에 섞어 밥상에 내 놓으셨다. 그때 그 자반 갈치 꽁지의 비린내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이민 초기에 300불짜리 ‘똥차’를 샀다. 첫 자가용이었다. 이 차를 타고 타주로 이사가는 사람에게 10불 주고 산 낚시대를 들고 코코 비치로 갈치낚시를 갔다. 40년 전부터 시작한 이 갈치낚시가 지금까지 우리 3부자의 유일한 공동 취미로 남아있다.
그동안 올랜도 한인 중 우리 할멈에게 생선 선물을 받지 않았으면 간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도 할멈은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운타운 인근 아파트에 들러 참치 한마리씩 나누어 주자고 한다. 그리고 생선을 얻는 것을 진정 고마워하는 사람에게만 주자고 덧붙인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멈은 “갈치 씨알이 작은 것만 준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어쨋든 이날 따라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었던 한국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경비원은 내가 낚시꾼인 것을 알고 “저쪽으로 가보세요” 그러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에서 두 노인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싱싱한 생선이 있는데 혹시 필요합니까" 하였더니, 나보다 젊어 보이는 노인이 쳐다보며 “잡은지 얼마나 됐느냐”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나도 얼떨결에 "한 일년 쯤 되었나…"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두분 중 허리가 굽은 한 분이 생선이 어디 있느냐며 일어서려고 하자, 다른 노인은 일년 된 생선은 얻어 먹지 말라고 손을 잡는다. 그러나 허리 굽은 그 분은 노파의 잡은 손을 뿌리치고 나를 따라 나왔다. 내 차에 오니 그새 몇사람이 와 있었다.
이제 우리 할멈이 나설 차례다. "우리 아들이 배를 몰고 깊은 바다에 가서 참치를 잡아 왔어요. 어제 잡은거예요" 하며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 먹으면 맛있고, 참치는 몸에도 좋다고 자랑한다.
할머니는 세상에 이렇게 좋으신 분들이 있느냐며 고마워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기 먹을 점심에서 빵과 요구르트를 할멈 손에 쥐어 준다. 할멈은 "먹은 것으로 할게요. 이것은 할머니 점심이니 할머니께서 잡수세요" 하면서 할머니 봉투에 다시 넣어준다. 할머니는 "세상에. 힘들게 잡은 생선을 공짜로 주는교!" 한다.
돌아오는 길에 할멈은 “아들이 갈치 낚시 하러 오라고 하면 가서 잡아다가 저렇게 좋아하는 분들에게 또 드려야 겠다"며 “낚시 가서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할멈은 "자신의 점심을 나에게 먹으라고 주는거야" 하며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할멈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인 지 모르겠다”며 표정이 어두워진다.
나는 "우리 3부자가 취미생활로 얻은 부산물 중 일부를 남에게 나눠 주는 것 뿐이다. 아까 그 할머니같은 분에게만 주면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더니 할멈의 표정이 금새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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