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 8월 9일 금요일 일제 항거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1863. 01. 26 ~ 1949 08. 05)의 70돌 추모식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거행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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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9 [21:21]
【Seoul(Korea)=GW Biz News】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8월 9일 금요일, 대한제국 시절 우리나라 국권 수호를 위해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 유공자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1863. 01. 26 ~ 1949 08. 05)의 70돌 추모식이,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 주최로,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기독교백주년기념교회 선교기념관에서 오전 11시부터 열렸다.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본 추모식에는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마포갑,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 미첼 모스 주한 미국 대사관 공보 담당 공사(Minister-Counselor for Public Affairs Mitchell Moss), 허현 광복회 부회장,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유동균 서울 마포구청장,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 등 내외 귀빈 300여 명이 자리를 같이 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HMS) 공식 로고.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Hulbert Memorial Society=HMS, 회장 김동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76-8 독립유공자 복지회관 202호) 설립 목적=>(1).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발굴하여 헐버트 박사의 한국에 대한 공적을 진실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 정리-평가하여 국내외에 소개한다. (2). 한 이방인의 한국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에 감사함으로써 한국이 국제사회에 보은을 아는 민족으로,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평가되어 문화적 측면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한국의 대외 관계 증진에 이바지한다. (3). 헐버트 박사의 훌륭한 정신과 사상, 그리고 열정적인 삶은 우리 청소년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국내외에 헐버트 박사를 소개시켜 많은 청소년들이 헐버트 박사의 삶을 인생의 귀감으로 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4). 헐버트 박사의 한말 시대의 한일 관계에 대한 논문들을 정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 등 여가적 진실을 정화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대외 역사 정립에 일조한다. (5). 교육만이 살 길이라는 헐버트 박사의 위대한 교육 정신을 바탕으로 국내적으로는 교육의 중요성 확립에 밀알이 되며 대외적으로는 헐버트 박사가 우리나라를 체계 있게 최초로 외국에 소개한 업적을 바탕으로 외국인들에게 한민족과 한국을 올바르게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한다.☞<중장기 사업 계획>=>▲헐버트 박사의 업적 발굴. ▲학술 회의 개최. ▲교과서 수록 추진. ▲훈장 품격 상향 추구. ▲교육정신 함양 진력.☞<상훈>=>▲국가보훈처 보훈문화상(2013. 12. 18). ▲미국 미시간주립대 한국학회 2014 글로벌 코리아 상(김동진 회장). ▲제39회 외솔상(2017. 10. 26).
▲호머 베절릴 헐버트 박사(Homer Bezaleel Hulbert, 1863. 01. 26 ~ 1949. 08. 05, 한국 이름 허할보=許轄甫). 헐버트 박사는 지난 2013년 7월에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Photo=MPVA).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베절릴 헐버트 박사(Dr. Homer Bezaleel Hulbert, 1863. 01. 26 ~ 1949. 08. 05, 한국 이름 허할보=許轄甫)=>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 교수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로서 대한제국의 항일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였다. 대한제국에서 감리교 선교사, 교육자, 항일 운동가로 활약하기도 한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대한제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1907년 고종 황제를 적극 지원해 헤이그 밀사 파견과 밀사 활동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베델(영국 출신)과 아울러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상훈>=>▲건국훈장 태극장(=독립장)(1950. 03. 01). ▲국가보훈처 선정 외국인 최초 이 달의 독립 운동가(2013. 07). ▲금관문화훈장(2014. 10. 09). ▲제1회 서울아리랑상(2015. 10. 07)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오른쪽 두 번째)이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오른쪽 세 번째)과 현장에 자리를 같이 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미국 버몬트 주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 내외, 달젤 벙커(Dalzell A. Bunker) 내외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점차 조선(=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했고 1891년 12월에 귀국하게 된다. 이후, 조선(=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다시 조선에 입국했다. 이 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조선(=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바로 이 헐버트 박사였다.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신현주 감독이 기도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김동진 회장이 환영사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이 추모사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미첼 모스 주한 미국 대사관 공보 담당 공사(Minister-Counselor for Public Affairs Mitchell Moss)가 추모사에 나섰다. 당초 참석 예정이었던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는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의 한국 방문으로 부득이 불참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허현 광복회 부회장이 추모사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마포갑,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이 추모사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헐버트 박사의 1949년 모습이 동영상 화면에 떴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이 인사말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유동균 서울 마포구청장이 인사말에 나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김다혜 이화여대 국문과 3학년 학생(탈북 새터민)이 헐버트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 박사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그는 조선(=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특히, 1905년에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했던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 박사를 '특별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들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여 헐버트 박사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아울러, 헐버트 박사는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만들도록 한 주인공이다. 하여, 한글학회(회장 권재일)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이 헐버트 박사를 받들고 있다. 헐버트 박사는 평상시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한글학회 정회원인 (맨왼쪽) 최용기 몽골민족대 부총장, (왼쪽에서 세 번째) 이대로 한글사용성평가위원회 위원장이 자리를 같이 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서재필, 이승만 등의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조선(=한국)을 잊지 않았다. 헐버트 박사는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대한민국에 초대되었으나 8월 5일 금요일에 애석하게도 기관지염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하고 만다. 당시 대한민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는 것보다 대한민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령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대한민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김동진 회장(오른쪽)이 백영찬 자문위원(왼쪽)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헐버트 박사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묘비명을 써 주겠다고 언약했다고 하나 이 언약은 공수표가 됐다. 하여, 헐버트 박사 묘비는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다가 무려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이던 정용호 씨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1999년 8월 5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친필인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일곱 글자가 묘비에 새겨지게 되었다.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1949년 8월 5일 금요일 별세한 헐버트 박사의 묘비에는 무려 50년이 지난 1999년 8월 5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빨간 네모 안)가 새겨졌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한편, 본 추모식 현장에서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헐버트 박사가 경숙 국치일 당일인 1910년 8월 29일에 미국 언론에 기고한 'The Extinction of Korea(한국의 소멸)'이라는 기고문 내용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일본의 가면이 벗겨졌다. 일본 외교는 이중성이 전부다. 그들은 항상 처음에는 달콤한 말로 이웃 나라를 돕는다고 하고, 종국에는 그 나라를 갉아 먹는다. 일본 외교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제 모든 나라는 일본의 사기 외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일본 외교는 속임수가 자산이다.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은 바로 일본이 한국의 군사력을 얕잡아 보기 때문이므로, 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힘을 길러 일본의 사기 외교에 대응해야 한다." 무려 100년 전의 기고문 내용이다.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김동진 회장이 "일본 외교는 속임수가 자산이다"라는 헐버트 박사의 1919년 기고문 내용을 전격 공개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이어, 김동진 회장은 "저는 오늘 '헐버트 박사님은 진정 우리에게 어떤 분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전제하고, "마치 114년 전 을사늑약 당시 일본과 맞닥뜨렸던 기시감(=旣視感<=프랑스어 Deja Vu=데자뷔=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이 밀려오는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더더욱 박사님이 그리워진다"는 소회를 피력했다.
"일본 총리에게 사죄한다!"고 며칠 전 외친 J라는 한국 여자가 제발 이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에드 로이스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아베 총리가 실수했다"며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일침을 놓은 판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시절의 금 모으기 식으로 서로 힘을 모으고, 일본의 양심 세력들과 연대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나서도 모자랄 판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궤변일까? 길 가는 한국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 보자!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구한말 한반도 침략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리고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라카미(村上), 나카무라(中村), 미와(三輪) 같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때려잡던 일본 국적의 악질 경찰 이름을 들으면 기분이 유쾌하냐고? 그리고, 한 번 더 최대한 완곡하게 물어 보자! "혹시, 너네 할아버지, 친일파 아니었냐?"고.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입에 거품 물면서 "때려죽인다!"고 도끼 들고 쫓아 올 터이다. 한민족의 일본의 침략과 군국주의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이렇게 뿌리가 깊으며 그야말로 외국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적의 서민들, 즉, 보통 사람들의 일반 정서임을 재외 국민인 본 기자는 단언한다.
어쨌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두견새(=호토토기스=ほととぎす=杜鵑)가 울어 주면 좋겠는데 안 울 때, 역대 일본이 대응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요컨대, 두견새가 울어 주면 좋겠는데 안 울 때, 역대 일본이 대응하는 방식이, 기존에는, ▲1. 울 기색이 없으니 단칼에 죽여버리자(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방식)=>▲2. 울 기색이 없더라도 울려 보도록 무조건 노력해 보자(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방식)=>▲3. 울 기색이 없더라도 울 때까지 세월아 네월아 기다려 보자(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방식)였는데, 이제는 "울 기색이 없으니 두견새가 둥지를 튼 산과 들에 불을 질러 두견새 밥줄을 끊자"라는 기상천외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방식이 새로 나온 것이다. 두견새 밥줄을 끊는 건 좋은데, 둥지, 산, 벌판은 그렇다 치고, 논밭, 마을까지 다 불사르고 섬나라 전체를 다 태워버릴까 심히 걱정스럽다. 더군다나, 생태계 복원하려면 수십 년 걸릴 터인데?
이런 가운데, 지난 8월 7일 수요일, 세계한인언론인협회(회장 전용창)가 일본 경제 침략 규탄 성명서를 전격적으로 채택하고, 한반도와 전 세계 한인 동포들이 하나 된 함성으로 외치는 'No Japan!' 운동에 적극적인 지지와 동참을 천명했다. 740만 재외 한인 동포들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애쓰는 지구촌 재외 언론인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기회가 된 김에 전문을 게재해 둔다.
☞세계한인언론인협회 '일본 경제 침략' 규탄 성명서 전문=>일본 경제 침략, "강력히 규탄한다!" 제2의 항일 투쟁 선언, "진정한 보복은 철저한 친일 잔재 청산!"=>전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세계 한인 언론인들은 최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결정한 핵심 품목 수출 규제 대상 지정과 화이트 리스트 배제 조치를 '심각한 침략 행위'로 규정한다. 일본의 이번 조치는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명백한 무역 보복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100년 전 자신들이 유린했던 식민지 조선쯤으로 여기는 군국주의 역사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경제 주권' 침략이며, 인류 보편적 가치와 민주주의 대원칙에 근거한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무시하는 '사법 주권' 침략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나 사과조차 없는 일본이, 불편한 과거 국가 범죄 배상 판결을 빌미로 피해 국가에 경제 보복을 가하는 건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한국 경제를 볼모 삼아 대한민국을 길들이고, 전범 국가의 잔인한 위선을 경제 보복으로 가리려는 일본 정부의 악의적인 의도에 전세계 한인 언론인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한인언론인협회는 대한민국 사법부와 경제 주권을 유린한 일본 정부를 규탄하며, 과거사 반성 없이 구시대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도에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일본 정부는 국제 사회 질서를 붕괴하고 동아시아의 분열과 대결을 획책한 구시대적 경제 보복을 즉각 철회하고, 과거사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로 전범 국가로서의 진심 어린 사과와 정당한 배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잔인하고 탐욕적인 힘의 외교는 과거 시대의 퇴물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제국주의 야욕 따위에 먹잇감이 되는 힘 없는 약소국이 아니다. 경제 침략과 사법권 침탈의 일차 방정식으로는 대한민국을 이길 수 없다. 폭력과 살육으로 무장한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태극기 하나 손에 들고 최후의 일각까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선조들의 혼이 되살아나고 있다. 또 다시 한국을 제물 삼은 일본의 위선적인 도발을 규탄하는 ‘제2의 항일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일본 역사는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뒤바꾼 대한민국 민중의 저력'이 '21세기 항일 투쟁'을 선언하고 있다. 올해로 광복 74주년이다. 100년 전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혀 오늘날까지 시대 착오적 침략 행위를 자행하는 21세기 일본의 경제 침략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청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일본의 경제 침략을 단호히 분쇄하고, 산업 각 분야에 얽혀 있는 경제 예속의 끈을 확실히 끊어내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 세계한인언론인협회는 한반도와 전 세계 한인 동포들이 하나 된 함성으로 외치는 'No Japan!' 운동에 적극적인 지지와 동참을 천명한다. 이제 우리 차례다. 진정한 보복은 철저한 친일 잔재 청산으로 완성된다. 2019년 8월 7일.
▲호머 헐버트 박사 70돌 추모식 현장. 취재에 나선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UHM) 교수(본지 몽골 특파원 겸 KBS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가 헐버트 박사 묘비 옆에 굳건히 섰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8월 9일 금요일, 호머 헐버트 박사(1863. 01. 26 ~ 1949 08. 05)의 70돌 추모식이 열린 8월 9일 금요일 서울의 기온은 33도를 넘었다. 참으로 무더운 날씨였으나, 재외 동포인 본 기자는 헐버트 박사의 명복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빌었다. 헐버트 박사의 강물 같이 흘렀던 정의와 마르지 않던 공의는 지금도 한민족 구성원의 육체 속에서 선혈처럼 면연히 흐르고 있었다.
▲Reported by Alex E. KANG, who is a Korean Correspondent to Mongolia certified by the MFA led by Foreign Minister D. Tsogtbaatar. ⓒ Alex E. KANG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alex1210@epo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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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ius, Altius, Fortius (Faster, Higher, Stronger) <편집자주> 국제 회의 동시 통역사인 알렉스 강 기자는 한-몽골 수교 초창기에 몽골에 입국했으며, 현재 몽골인문대학교(UHM) 한국학과 교수로서 몽골 현지 대학 강단에서 한-몽골 관계 증진의 주역이 될 몽골 꿈나무들을 길러내는 한편, KBS 라디오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으로서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촌에 몽골 현지 소식을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