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이듬해인 1920년 3월1일에 프랑스에 살고있던 한인들이 3·1독립선언 기념 축하식을 거행한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깊은 일이었다.
당시 <독립신문>은 "留法韓人의 3월 1일 축하"《신한민보>는 "프랑스에 있는 형제들의 독립 경축 : 쉬이프 지방 한인민회소 에서" 라는 제목으로 1920년 3월 1일 프랑스 스위프의 재법한국민회가 거행한 3·1운동 1주년 기념 경축식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경축식에 참가한 인사들은 1919년 11월 11일 스위프에 이주한 한인 노동자 35명과 함께 학생 10여 명, 베르덩에서 가족을 데리고 온 10여 명, 그리고 파리 위원부의 인사들이 모였다고 전했다
2019년은 프랑스에 한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와서 거주하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한인사회100주년' 사업과 함께 '프랑스 한인 100년사' 출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상무 한인회장을 만나 그 의미와 취지를 들어본다.
'프랑스한인사'를 출간하게 된 동기는?
프랑스한인회가 50주년을 맞으며 프랑스 한인사회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한인사회 역사를 바로 세워나가자는 취지로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한인 100주년' 기념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100년을 맞는 프랑스 한인사회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프랑스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일제 강점기에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이 노동자와 유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펼쳐 온 사실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져 왔다.
당시에 유럽 내에서 한인들이 세운 최초의 한인단체가 프랑스에 존재했고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던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이 땅에 살던 우리의 선대들이 일제의 만행과 실체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일을 주도적으로 펼쳐왔고,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광복의 주역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규명하고 알려야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프랑스 한인사회의 효시는 언제로 보는가?
프랑스에 건너 온 최초의 한국인으로는 1886년 한불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기메 박물관에서 근무했던 홍종우로 알려져 있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도 프랑스에 온 한국인(조선인)들의 기록이 이곳 저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프랑스 한인사회의 효시는 1919년 11월에 유럽 최초로 결성된 '재법한국민회’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동안 '재법한국민회'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많이 알려진대로, 김규식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는 유럽에서의 독립 활동 근거지를 구축했다. 국제적인 호소 및 출판, 언론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특히 당시 파리는 유럽의 중심으로 국제 정세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있던 500명의 한인 노동자중 200여명이 영국 애든버러로 건너오게 되는데, 이때 임시정부는 파리위원부에 있던 서기장 황기환을 영국으로 급파해 이중 35명(박춘화, 박단봉, 차병식, 배영호, 박선우, 장동채, 하진서 등) 을 데리고 1919년 11월19일, 르 아브르 항에 도착하게 된다.
1차세계대전 전후 복구 노동자로 프랑스 노동부의 허가를 받고 파리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Marne의 쉬이프(Suippes)에 있는 ‘전지 수선공사’에 모두 함께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작성된 노동자 명부를 보면 이들 명단 옆에 '한국인(COREEN)'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한국 국적으로 프랑스에서 정식 체류증을 받은 것인데, 당시는 일제 점령기였지만 프랑스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로서 인정한 법적인 증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프랑스에 온 이주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일들을 했나?
조국을 잃은 이들은 참으로 지난한 삶을 살아왔다. 시체들을 정리하고 묘지를 만드는 척박한 환경과 악조건 속에서도,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를 만들어 독립자금을 모으고 파리위원부를 지원했다. 고된 노동 가운데에도 임금의 약 25%를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활동 자금으로 지원할만큼 애국심이 높았고, 파리위원부의 존속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당시 유학생들과 애국지사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말, 그리고 정신을 배우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20년 3월 1일에는 삼일절 1주년 기념 경축식을 거행하기도 했는데, 유럽 각지에 있던 한인들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법한국민회의 활동은 언제까지 이어졌나?
자국의 이권과 이해관계에만 눈이 어두웠던 서구 열강들의 냉대와 일제의 방해로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소강상태로 들어갔지만, '재법한국민회'에서 이름을 바꿔 새로 결성된 ‘한국국민회의’ 대표로 뽑힌 홍재하는 회원들로부터 거둬들인 독립성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두 차례나 송금했고, 또 ‘독립신문’을 구독하기도 했다. 그는 광복 후에도 제3차 UN총회가 파리에서 개최될 때 장면, 조병옥, 김활란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 승인 외교활동을 측면에서 적극 지원했으며, 1949년에는 대한민국 파리공관 설치에도 기여한 바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자세한 활동과 활약상은 '프랑스 한인 100년사'에 수록될 예정이다.
지난 8월 18일 한위클리 사무실에서 '프랑스 한인 100년사' 출간 준비모임을 갖고 있는 간행 위원들
왼쪽부터 채희석 목사, 이석수 한위클리 발행인, 오영교 한불통신 대표, 이진명 명예교수, 이상무 한인회장
'프랑스 한인 100년사' 출간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
미주나 아시아에 비해 지금까지 유럽지역의 한인사회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번 프랑스한인사 출간을 통해 새로운 개념과 기준을 삼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민족정신을 지키며 살아온 선배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파리위원부 활동과 재법한국민회의 활동과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에게도 미래를 향한 자부심과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끝으로 프랑스 교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설립 100주년, 프랑스한인사회 100주년, 한국인 유학생 100년사를 통해 현재 프랑스한인회가 어떠한 방향을 지향하고 나아갈지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프랑스한인사는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번에 그동안의 자료들을 한데 모으고 정리하여 역사를 재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통해 유럽의 중심인 프랑스에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정립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재법한국민회의 뿌리를 찾아 깊숙히 들어간다면, 과연 그들의 후손들이 프랑스 어느 곳에 살고 있는지? 우리의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이어졌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미래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으로 희망을 걸어 본다.
한인사 출간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이를토대로 정부의 지원이나 국내 방송국의 참여를 끌어 내 '유럽한인100년사'를 다큐멘타리로 제작 해 영상으로 확산시키는 일도 진행할 수 있으리라 본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시기에 맞춰 '유럽한인사'가 재조명 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교민 1세대라고 불리는 원로분들이 80~90세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만큼 재불교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편집부
[알립니다]
'프랑스 한인 100년사'에 수록할 중요한 자료나 출판에 직간접적으로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프랑스한인회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한 자료는 디지털 작업 후, 원본 그대로 돌려 드릴 것이며, 소중한 말씀은 직접 찾아가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 한인 100년사 출간 위원회
위원장 이상무 프랑스한인회장
Tel: 06 0917 2602
E-mail : leesangmoo0719@gmail.com
[위원및 필진, 스텝명단]
이진명 이상무 이석수 오영교 채희석 이장규 이부련 권순철 이병주 김현숙 김종완 신재창 김신원 혜원스님 이준성 조윤경 박만훈 (2018년 8월22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