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홍재하(1960년 타계)가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 하단에 ‘아버지와 나 1943년’이라고 적혀 있다. [홍재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 제공=연합뉴스]
홍재하(1892-1960)는 경기도 양주군 영수리에 살던 아버지 홍종영의 3남 1녀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체류증에는 인지용 휴앙, In Chiyon Fuan, 중국 상해에서 1898년 1월 17일 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892년에 출생했고,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다른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여권에 중국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12월에 오와즈(Oise) 도 출신인 프랑스 여인 마리-루이즈 뒤보아(Marie-Louise Dubois, 당시 18세, 간호부)와 카톨릭 성당에서 결혼했다. 마리-루이즈의 가족들은 그녀가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나라도 없는 한국이라는, 이름도 들어 본적이 없는 나라 사람과 결혼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으나, 이 문제는 성실한 홍재하의 생활 태도로 곧 해결되었다. 더욱이 마리-루이즈의 여동생은 다른 한국인 ‘전달뭉 June Tall Mung’과 결혼하기도 했다.
그의 가족의 성은 휴앙(Huan)이고, 아이들 이름에는 프랑스 이름 외에 ‘홍’을 더 붙였다. 홍재하 부부는 파리 15구에 살다가, 드랑시(Drancy), 콜롱브(Colombes)로 이사해 거주했다. 홍재하는 전쟁터 수복 공사 노동자로 출발하여, 상인, 2차 대전 중에는 항공기 제조 공장에 근무하기도 했다.
홍재하 부부는 2남3녀를 두었다. 맏딸 자클린느(Jacqueline) 홍은 1952년 2월 9일 프랑스인 보석공과 결혼했다. 차녀 자닌느(Jeannine) 홍은 1955년에 한국의 CPA 지점장 장화섭과 결혼했고, 3녀 르네(Renée) 홍은 1952년에, 후일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되는 임영방과 결혼했는데 자신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 상무관실에서 일했다.
그 사이 장남은 죽고, 차남은 영국에서 유학한 후 정밀기기 엔지니어가 되었다.
홍재하는 특히 파리 위원부 및 통신국에서 비서로 일하던 H. 마티앙(Mathian) 부인과 미국인 브르난(Brenan)과 자주 왕래가 있었다. 홍재하는 프랑스나 벨기에의 정치인에게 한국의 광복에 힘써 줄 것을 촉구하였고, 해방 후에는 매년 8.15 광복절이 되면 그의 집에 태극기를 내달았다고 한다.
콜롱브의 홍재하의 집에는 많은 한국 유학생, 공관 직원들이 찾아왔다. 1948년에는 파리에 온 바오로 노기남 주교, 그리고 UN총회 대표단으로 온 김활란, 모윤숙, 장면,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등이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홍재하 부부는 정성을 다하여 이들의 조국 재건 노력에 건투를 빌었다고 한다. 홍재하는 장면을 만났을 때, 귀국의 뜻을 밝혔으나 본인의 집에서 귀국 여비를 댈 수 없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1960년 2월 10일 콜롱브(Colombes) 자택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콜롱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랑스(파리)=한인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