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3일 토요일 파리외곽 말라코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 이진명 교수의 장례 예식이 5월 25일 목요일, 13시 클라마르 파크드라메종 (Crématorium du Parc de la Maison, Funéraire de Clamart)에서 있었다.
이날 유가족과 한인 및 한국과 프랑스의 교육계 인사, 공관장 등 40여명이 고인을 추모하는 예식에 참석했다.
무엇보다 고인은 오랜 프랑스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인 고성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와중에 세상을 떠나, 한인들은 더욱 안타까워했다.
장례 예식은 고인이 초대 회장으로 있었던 한불언어문화교육자협회(Association Française des Enseignants de Langue et Culture Coréennes)에서 준비한 ‘ 이진명 교수님과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라는 영상으로 시작되어 플룻 추모 연주로 이어졌다.
이석수 프랑스존 대표의 영상 추모사, 권혁운 총영사(최재철 대사 대독), 송안식 한인회장, 왕민숙 리옹3대학 교수, 이부련 전 교육원장의 추모사가 있었다.
이석수 프랑스존 대표는 영상 추모사를 통해, ‘지금, 프랑스에서 불고 있는, 한국어 한류 열풍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랑스에서 한국어 발전의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틈틈히, 프랑스에 첫 발을 내디딘 한국인을 비롯하여, 해방 전후의 재불한인들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해 오셨고, 이를 토대로, 프랑스 한인100년사를, 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 한인사회의, 역서로 기록될 이 책은, 교수님의 오랜 연구 자료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던 일일 것입니다. 그동안 보여주신 희생과 헌신, 열정에 머리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고 이진명 교수의 미망인인 이요꼬 여사는 추모사에 앞서 슬픔에 겨워 잠시 흐느꼈다. 그리고는 장례식에 참석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남편(고 이진명 교수)이 여러분들이 이렇게 참석해준 것에 경의를 표하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와 주셔서 나에게는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프랑스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을 이야기하면서, 남편의 삶은 연구와 출판에 항상 매진했다고 하면서, 다시한번 참석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어 권혁운 총영사는 일정상 참석하지 못한 최재철 대사의 추모사를 대독했다. ‘5월과 6월의 예정된 여러 행사에 선생님을 다시 뵐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여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고 이진명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업적을 상기시키면서 추모사를 이어갔다. ‘교수님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어와 한국학이 프랑스에서 더욱 크고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그리고 한인사회가 더욱 번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안식 한인회장은 ‘급작스런 비보를 듣게 되어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고 하면서, ‘교수님이 원하셨던 한인회관 증축에 37대 한인회가 반드시 그 초석을 놓겠다’고 했다. ‘프랑스 교민을 위한 모든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요’라고 했다.
왕민숙 리옹 3대학 교수는 이진명 교수의 제자이자,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밝히면서, 논문 지도 시 이진명 교수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면서, 그에게 빚을 졌다고 하면서 추모했다.
이부련 전 프랑스 한국 교육원장은 1987년 이진명 교수를 처음 만난 때를 추억하면서, 말 없이 항상 진지했고, 학업에서는 최고였음을 전하면서, 그의 학문적인 성과와 더불어 전공부분에만 제한을 두지 않고 한국과 관련된 광범위한 연구에 매진한 것들을 열거했다. 또한 이진명 교수가 프랑스 고등학교내 한국어 보급과 발전의 필요성을 보여준 점은 특히 주목할만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진명 교수는 인자한 남편이었고, 배려심 깊은 형제였으며, 충실한 친구였다며, 울먹이면서 추모사를 마쳤다.
이어 '마지막 인사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고, 화장 후 유가족들에게 유골함이 인계되었다. 유해는 한국으로 운반되어 고인의 고향인 경상남도 고성의 선산에 묻힐 예정이라고 한다.
<파리광장편집부>
이진명 교수 장례식 기사 파리광장사이트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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