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불 프로방스 알피 산맥(Les Alpilles)은 아를르와 아비뇽에 걸쳐 동서로 나지막하게 드러누운 길이 25km 정도의 산악지대이다. 숨은 보석이나 다름없는 독특한 절경을 이루는 ‘알피’는 ‘제 2의 알프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알프스처럼 높지 않지만 올리브 밭과 하얀빛 기암바위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국립공원지대이다.
알피 산악지대는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손꼽는 레 보 드 프로방스(Les Baux-de-Provence)를 포함하여 퐁비에이(Fontvieille), 모싼느(Maussane-les Alpilles) 등 마을 16개를 감싼다. 연한갈색 벽과 붉은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선 마을마다 로즈마레, 라벤더, 백리향을 담은 프로방스 특유의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아를르를 출발하여 굽이치는 산길도로 D17을 따라 알피 산악지대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완벽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동차를 세워야할 곳은 퐁비에이 마을. 알퐁스 도데(1840년-1897년)의 풍차로 유명한 마을이다.
▶ ‘도데의 풍차’
‘도데의 풍차(Le moulin de Daudet)’는 퐁비에이 마을을 벗어나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주변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바람을 가장 많이 받는 경사진 곳에 세워져있다. 1915년까지 밀을 빻았던 방앗간으로 1931년 유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전기가 없었던 시대에는 물이 흐르는 곳에 세워진 물레방앗간에서, 혹은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는 날개 달린 풍찻간에서 밀가루가 만들어졌다. 퐁비에이 마을에는 4개 풍차가 있었지만, 현재 ‘도데의 풍차’만이 잘 보존되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1814년에 세워진 이 풍차는 원래 생피에르 혹은 리베(Ribet)라 불렀으며, 1935년부터 ‘도데의 풍차’로 이름이 바꿔졌다. 알퐁스 도데가 이 풍차에서 살았다거나 주인이 된 적은 없다. 그가 풍차를 처음 본 것은 20세 때인 1860년, 첫눈에 야성적이며 사막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독특한 언덕배기의 풍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도데는 파리에서 저명한 모르니(Morny) 공작의 비서로 근무하다 질병에 걸리자, 사촌이 살던 18세기 몽토방(Montauban) 성에서 휴양하러 퐁비에이 마을을 찾았다. 이후 그는 매년 몽토방 성에 머물며 풍차가 있는 언덕까지 산책을 즐기곤 했다. 이때 남불 특유의 덤불숲 오솔길에서 방앗간 사람들과 우연히 스치거나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들로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동화, 민담, 목동들과 관련된 설화 등을 전해 들으며 젊은 작가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들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탄생된 작품이 유명한 단편집 <풍찻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 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뤼브롱(Le Luberon) 양치기의 아름다운 플라토닉 사랑을 담은 ‘별’을 포함하여 주옥같은 24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한편 알피 산맥자락은 뤼브롱 산의 끝자락과도 연결된다.
훗날 도데는 자신의 저서들 중에 <풍찻간 소식>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토로했다. 남불 프로방스의 햇볕과 정서, 젊은 날의 향수를 담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퐁비에이 마을체류와 풍차는 <풍찻간 소식>을 잉태한 창작모태가 된다.
▶ 풍차에서 전하는 이야기들<풍찻간 소식>
작품 제목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나의 풍차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이다. 도데는 자신 스스로가 풍찻간 주인이라고 상상하면서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자연스럽게 작품배경에는 풍차와 주변 정경들도 녹녹하게 스며있다.
첫 단편작품 ‘정착(Installation)’에서 서술자는 시끄럽고 번잡한 파리를 떠나, 남불 프로방스에 정착하여 늙은 부엉이와 하얀 토끼들만이 20년 이상 지켜왔던 방치된 옛 방앗간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피력한다.
세 번째 작품 ‘코르니 노인의 비밀(Le Secret de Maître Cornille)’에서는 60평생 풍차를 돌리며 밀을 빻는 일에 종사했던 제분업자의 장인정신을 담아냈다. 인근에서 증기를 이용한 새로운 제분 기술이 도입되자 코르니 방앗간을 찾는 주민들의 발걸음은 뚝 끊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코르니 방앗간은 밀을 빻는 것처럼 여전히 풍차가 돌아가고, 노인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방앗간 내부를 보여주는 법도 없다. 바로 여기에서 방앗간 노인을 둘러싸고 미스터리가 생겨난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세겡 씨의 염소(La Chèvre de M. Seguin)’에서는 농가울타리와 밧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산으로 가고 싶어 하는 염소 그랭그와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세겡 씨는 산에는 늑대가 있어 위험하다고 만류하지만, 그랭그와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저자는 산으로 가려는 염소의 심리상태를 노래 부르듯 섬세하게 묘사했다. 한 70대 여성독자는 8살 때 이 단편을 읽었는데, 결국 산으로 떠난 염소가 늑대에게 잡혀 먹히는 장면에서 너무 슬퍼 울었다는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도데는 실지로 세겡 씨라 불리는 마을주민과 알고지낸 사이였다고 한다. 작가가 생전에 몽토방 성에서 풍차까지 산책을 즐겼던 숲속의 오솔길 정경은 ‘세겡 씨의 염소’에 잘 반영되어 있다.
▶ 반 고흐의 생-레미 드 프로방스
퐁비에이를 통과하는 지방도로 D17을 따라 계속해서 달리다가 분기점에서 좌측 산길 도로로 꺾어 10분 정도 더 주행하면 레 보 드 프로방스에 이른다. 이후 갈림목에서 다시 좌측 산길 D5로 접어들어 15분 정도 아슬아슬 달리면 산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때 눈앞에 잔잔한 전원지대가 펼쳐진다. 숨 가쁘게 벼랑길을 올라왔던지라 저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하는, 사이프러스와 올리브나무가 있는 평원지대로, 반 고흐에 의해 불멸의 풍경으로 굳어진 생-레미 드 프로방스(Saint-Rémy de Provence)이다.
고흐는 아를르에서 고갱과 불화 끝에 귀를 자른 후 정신적 평정을 찾기 위해 생-레미를 찾았다. 이곳 생-폴 드 모졸(Saint-Paul de Mausole) 수도원에서 1889년 5월에서 1890년 5월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화폭 150여점을 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가 순수한 예술적 열정에 취해 화폭에만 전념했던 시기로 간주된다. 섬세하고 맑은 감수성마저 묻어나는 붓꽃 그림 등, 수도원 정원에 핀 꽃들뿐만 아니라 남불의 상징인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들을 즐겨 그렸던 시기이다.
로마시대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생-레미 드 프로방스는 반 고흐의 발자취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고흐가 체류했던 병실, 수도원 내부의 ㅁ자형 정원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생-폴 수도원에서 마을까지 1.5km에 이르는 반 고흐 산책코스도 마련되어 있다. 화가가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렸던 각 장소마다 화폭 복사본과 더불어 안내팻말이 세워져 있다. 그때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반 고흐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고흐의 사이프러스나 올리브 밭을 담은 화폭배경에는 주로 푸른 산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알피 산이다. 그 산 너머 건너편에는 알퐁스 도데의 풍차가 있는 퐁비에이가 자리잡고 있다.
아를르를 출발하여 퐁비에이를 거쳐 레 보 드 프로방스에 이르는 산길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면서 남불 특유의 낭만적인 정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레 보 드 프로방스에서 생-레미 드 프로방스로 이어지는 벼랑길은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할 만큼 스릴감과 더불어 환상적인 절경을 이루는 알피 산맥의 진면목을 제대로 감상하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이병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