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언협 유럽대회 후기3] 붉은광장과 크레믈린궁에서 보낸 하루
누군가에게 이리 맞고 저리 맞아서 혼쭐이 난 듯한 얼굴로 눈만 빼꼼이 내민 채 20분쯤 걸어가니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붉은광장’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경복궁 안에 여러 유적들이 있듯이 붉은광장은 크레믈린궁 안에 있는 넓은 광장 유적지를 말합니다. 크레믈린궁은 1156년에 최초로 세워진 후 14세기에 증축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웅장한 모습을 갖춘 것은 15세기 이반 3세때였다고 합니다. 음침한 분위기를 풍길 것만 같았던 붉은광장은 백색 청색, 그리고 붉은 색이 어우러진 고색 창연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붉은광장은 러시아어로 크라스나야 플로샤디(Krasnaya Ploshchad)라는데요, 크라스나야는 ‘아름다운’이란 뜻이고, ‘붉은’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합니다. 영어 ‘레드’로 번역되면서 아예 ‘빨갱이 광장’이 된 것입니다. 붉은광장은 꽃피고 녹음이 우거지는 봄철과 여름철 젊은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낭만의 장소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붉은광장은 러시안들의 애환과 고통과 낭만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우리가 아파트와 상업용 세멘트 건물로 둘러쳐진 황량한 광장에서, 매연으로 가득찬 회색빛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질러댔다면, 러시아 민중들은 800년도 넘는 역사의 흔적이 묻어있는 이곳에서 자유를 노래하고 피를 흘리고 토론을 벌이고 승리의 퍼레이드를 벌였던 것입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이곳에서 장엄한 성가행렬을 벌였고, 1917년 10월혁명 때에는 적군이 백군과 백병전을 벌여 승리의 노래를 부른 곳이기도 합니다. 오뚜기 같은 불굴의 투쟁가이자 해박한 사회주의 이론가 레닌이 연설로 대중을 사로잡은 곳도 이곳이고, 2차대전 직후에 승리의 퍼레이드를 벌이고 나치 독일로부터 빼앗은 군기를 쌓아두고 승전가를 부른 곳이기도 합니다. ‘성채’ 또는 ‘요새’라는 뜻의 크레믈린궁 앞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반겨 맞은 것은 리디머스 타워(Redeemer’s Tower)였습니다. ‘구원자의 탑’이라는 뜻이지요. 1491년에 세워진 이 탑의 꼭대기에는 금빛 별이 붙어 있고 바로 밑의 벽면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사방에 멋진 시계가 박혀있고 위 꼭대기 안쪽으로 벨이 달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탑의 문을 통해 황제와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행지를 가면 사진을 찍어 오는데요, 실상 실물보다 사진이 더 멋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본 바실리 성당은 사진이나 그림, 또는 영상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동화 속에 빨려 들어온 기분이어서 한동안 멍해졌습니다. 걷다가 또 보고 뒤돌아서 또 보고 그랬습니다. 예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 1편 앞부분에서 두어 페이지에 걸쳐 지리산 어느 지역의 절경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너무 멋있게 느껴져서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자주 다닌 분에게 물었더니 웃으며 “나름 멋있기는 하지만 그저 한 문장이나 기껏 두 문장으로 묘사하면 그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8개의 양파 모양 지붕들로 머리를 얹고 있는 바실리 성당은 사진기로 담거나 서툰 글로 묘사하려 들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그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러며 가만 놔두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러시안 정교회 성당인 바실리 대성당은 1555년~1560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때 비잔틴 양식을 빌린 러시아 버전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반 4세가 다 지어놓은 바실리 성당의 모습을 보고는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짓지 못하도록 하자’며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을 정도라네요.
이날 크레믈린궁 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방부 처리된 레닌이 잠들어 있는 레닌묘를 방문한 것입니다. 현지의 한 한인은 “20년 동안 여러번 시도했지만 올 때마다 줄이 너무 길어 이번에 보게되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일정한 시간에 한정된 인원을 입장시키기 때문에 여간 운이 좋지 않으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레닌은 1924년 1월 54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요, 그가 누운지 딱 92년째 되는 셈입니다. 잠시 구불구불 어둠침침한 통로를 통해 레닌묘를 찾아 들어가니 비좁고 길쭉한 방에 레닌의 유리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경내를 지키고 있는 경찰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촬영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우선 레닌이 그리 코도 높지 않았고 왜소해 보일 정도로 단구였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30초나 될까말까한 조우였지만, 충격이 조용히 밀려왔습니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제정 러시아의 짜르(황제) 니콜라스2세가 사는 궁전 앞에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습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그들은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 “하나님이여, 짜르를 구해주소서”라는 찬송을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자기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자비로우신 아버지' 짜르에게 호소하는 행진이었지요. 그러나 지레 겁먹은 ‘아버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성 일요일’을 ‘피의 일요일’로 만들었고, 이후로 혁명의 불길이 러시아 전역 여기저기에서 솟아올랐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말하는 짐승’으로 간주된 농노들과 하루 한끼 배를 채우기 힘들었던 농민들과 착취당하는 공장노동자들로 넘쳐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시절에 특유의 투지와 끈기,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장하고 전체 노동자와 피압박 계급을 사랑한 열혈 청년 레닌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와 망명을 거듭하면서 한편으로는 맨셰비키와의 내부투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짜리즘 끄나풀들의 음모를 물리치며 마침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킵니다. 소위말하는 ‘10월혁명’입니다. 역사가들은 레닌과 그의 제자이자 동지인 트로츠키가 이끈 볼셰비키 혁명을 인간 자신의 의지와 지향에 따라 의식적으로 사회를 변혁한 최초의 혁명이라고 평했습니다. 사회가 더 이상 자연발생적이고 불가해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으로 분석하여 발전의 법칙을 찾아내고 인간의 집단적인 힘으로 변혁할 수 있는 대상이란 것을 입증해낸 혁명이란 것이지요. 어쨋거나 그의 인간에 대한 무던한 사랑과 정열로 엮어진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관속에 누워 기념물이 된 자신의 시신만큼이나 퇴색한 유물로 취급당하고 있고, 온갖 투쟁과정을 거치며 이룩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해체되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지 제법 되었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모두가 함께 잘라먹는 빵'에 대한 그의 유훈은 사라져가고, '내것은 내것이고, 네것도 내것'인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살아온 여행객들이 줄을 길게 서서 그를 구경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닌묘에서 빠져 나오자 한동안 두리번 거려야 했습니다. 몇발자국만 움직이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 타워들 때문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앞서 본 것 같은 타워들이 있어서 왠일인가 했더니 맨 먼저 본 리디머스 타워를 비롯하여 꼭대기에 지름 3.7미터 크기의 루비 별이 달려 있는 트리니티 타워, 성 베드로 타워, 시크릿 타워, 짜르 타워 등을 포함하여 무려 20개의 타워가 2.3킬로미터에 이른다는 크레믈린 궁을 빙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타워들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고 크레믈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이반대제의 벨타워를 중앙에 두고 각 타워마다 러시아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우리의 경복궁보다 작은 크기라는 크레믈린궁 안은 한마디로 러시아 건축물들의 진수를 보여주는 역사유물들로 가득했습니다. 20개의 타워들을 제외하고 몇가지만 꼽아 보면, 우선 성모승천사원(우즈펜스키), 성모수태사원(블라고베시챈스키), 모스크바 대공과 짜르들의 석관이 들어 있는 대천사사원(아르헹겔리스키), 12사도 사원, 국립역사박물관, 황제의 종, 대포의 황제 등 50곳이 넘는 역사유적들이 크레믈린궁 안에 있었습니다.
길이 5.34미터 구경 89밀리미터 무게 40톤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 황제’도 흥미로웠습니다. 1586년에 만들어진 대포알의 지름이 무려 105센티미터에 무게도 1톤이나 된답니다. 이 대포도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행한 대포입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한번도 발사된 적이 없는 ‘숫총각 대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첫인상만큼은 누구라도 말할 수 있을 만큼 강렬했습니다. 크레믈린궁은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과 색바랜 성당 내.외부의 수많은 벽화들, 역대 황제들과 러시아 정교회 성인들의 무덤,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탑들, 그리고 전쟁유물들에는 러시아인들의 애환과 혼이 켜켜이 묻어 있었습니다. 누군가들에 의해 오랫동안 채색되어 머리 깊숙이 박힌 이미지를 걷어내는 데는 한나절이면 충분했습니다. 우리에게 우중충하고 음침한 정치적 음모와 비밀의 상징으로 남아있던 ‘크레믈린’은 ‘동화의 나라 로서아’의 종교.정치적인 영웅들의 신화와 전설을 듬뿍 담은 ‘아름다운 교과서’였습니다. 크레믈린궁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세력과 세속정치 세력의 의지가 만들어낸 성채’라고 표현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레닌묘가 크레믈린궁에 있는 이유는? 실제로 소련이 해체된 후에 러시아 지도부가 구 소련의 잔재를 계속 삭제해 나가려는 흐름이 있어 왔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물이자 온 세계인들이 관광삼아 오는 크레믈린 궁에서만은 이를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도 반수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레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묘지를 옮겨야 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레닌 생전에 자신의 시신이 미이라로 보존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얘기도 나름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치 종교개혁가 죤 칼뱅이 자신의 무덤을 남기지 말라고 유언한 것처럼요. 즉 시신을 미이라로 보존하는 것은 괴이할 뿐 아니라 망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문화 관습적인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레닌묘가 크레믈린궁에 있는 이유는, 우선 소련을 재건하려고 하는 공산당이 자신들의 상징인 레닌묘가 모스크바의 심장인 크레믈린궁에서 사라지는 것을 강력 반대하고 있기때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러시아 영자 신문 <러시아 투데이>(RT)가 2013년에 벌인 ‘20세기 최고의 지도자’ 여론조사 결과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역대 지도자들에 대해 따로따로 호감도 조사를 했는데요, 브레즈네프와 레닌이 각각 56%와 55%를 차지해 선두그룹을 형성했고, 의외로 개혁파 고르바체프와 옐친은 20% 하반에 머물며 꼴찌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레닌이 러시아의 심장인 모스크바 크레믈린궁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분명해보입니다. 비록 구석방에서 창백한 얼굴로 구경꾼들을 올려다 보고 있지만, 러시아 역사의 한복판에 레닌과 그의 유산은 아직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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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Toi toi!!
뮌헨=남정호
짝짝짝!!!!
황송할 뿐입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글을을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