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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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 배경과 목적

 

나. 조사 방법

 

2. 624년 전 조선에 온 자와국 사신
1) 역사서에 기록된 자와 왕국과 교류
2) 인도네시아 사신 진언상, 그는 누구인가
3) 마자파힛 왕국의 문화 유적
4) 조선왕조와 마자파힛 왕조의 교류 실패
5)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동질성

 

3. 결론
– 한인사회, 한인역사 로드맵 제시하라
– 독립운동가 장윤원 1920년 바타비야 첫발…한인진출 100주년 기념관을 세우자

1. 개요

가. 배경과 목적

– 624 년 전 조선왕조 태종시대에 인도네시아 조와(이하 자와)국의 사신이 두 차례 방문을 하였으며 자와국 사신은 조선에 인도네시아의 토산물을, 조선 태종은 옷과 음식을 주며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였다는 기록을,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인도네시아 국빈방문에서 언급함.

 

–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옛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음을 환기하고, 그 관계의 시작과 과정을 알아보고자 함.

– 21세기 인도네시아와 한국, 양국의 발전을 위한 상생협력 교류는 꼭 이루어져야 하기에 역사적 관계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으며, 당시의 교류를 바탕으로 우리가 배울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 됨.

– 624년전 자와왕국 사신과 100년전 한인 인도네시아 진출은 불가피한 시대적 운명공동체의 사실(史實)이며, 인도네시아 한인사회가 미래를 위한 100주년 기념관 준비해야 함.

 

나. 조사 방법
– 한인포스트는 본 조사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부산외국어대 백승민, 가톨릭대 전수빈 인턴사원이 전담하여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술 함.

 

–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료 분석하고 발췌하여 본 보고서에 기초를 둠

 

– 조흥국 교수의 학술지 「조선왕조 초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마자파힛 왕국 간 접촉」 분석

 

– Indonesian Heritage Society, Jakarta 2006의 도서 ‘Trowulan’를 통한 자료 조사

 

교류란 근원이 다른 물줄기가 서로 섞어야 흐름, 문화나 사상 따위가 서로 통함을 이르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개발 협력, 경제 협약, 공공 외교 사업 등을 통하여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고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자국의 성장에 기여하는 ‘교류’의 중요성은 글로벌 시대에 날로 커지고 있다.

 

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국빈방문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포럼 기조연설에서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교류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

 

본 원고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교류를 주제로 과거, 현재의 관계를 살펴보고 더 나아가 미래의 상생을 위해 특집 기사를 기획하였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교류’를 주제로 하기에 사료와 학술지에 언급된 마자파힛 조와국과 교역에 집중 조사를 하였으며, 그 당시 조와국의 왕조 마자파힛에 대해서도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

 

2. 624년 전 조선에 온 자와국 사신

1) 역사서에 기록된 자와 왕국과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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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태종실록에 조와국 진언상이 군산도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있다<태조태종실록에 조와국 진언상이 군산도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인도네시아와의 교류는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에서 자와국의 사신이 두 차례 방문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때 등장하는 사신은 ‘진언상’이라는 인물이다. 진언상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7일 ‘섬라곡 사람 장사도(張思道)를 예빈 경(禮賓卿)으로 삼고, 진언상(陳彦祥)을 서운 부정(書雲副正)에 임명하였다’는 부분이다.

 

그 후, 태종실록에서 다시 자와국과의 교류가 언급된다.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8월 11일 ‘남번(南蕃)의 조와국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全羅道)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러 왜구(倭寇)에게 약탈을 당했다. 배 속에 실었던 화계 ·공작(孔雀)·앵무(鸚鵡)·앵가(鸚哥)·침향(沈香)·용뇌(龍腦)·호초(胡椒)·소목(蘇木)·향(香) 등 여러 가지 약재와 번포(蕃布)를 모두 겁탈당하고, 피로(被虜)된 자가 60인, 전사자(戰死者)가 21인이었으며, 오직 남부(男婦)를 합해 40인만이 죽음을 면하여 해안으로 올라 왔다. 진언상은 일찍이 갑술년에 봉사(奉使)로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조봉 대부(朝奉大夫) 서운 부정(書雲副正)을 제수하였던 자이다.’라고 언급되어있다.

 

사신이 방문한 것은 두 번이지만 태종 12년에 자와국과의 연결고리가 다시 등장한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4월 21일 ‘조와국[爪蛙國] 아열(亞列) 진언상(陳彦祥)이 사자를 보내어 토물을 바쳤으니, 유구(琉球)의 별종(別種)이었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진언상은 계수(稽首) 돈수 백배(頓首百拜)하여 의정부 대인(議政府 大人) 각하(閣下)께 여쭙니다. 내가 전년에 왜적(倭賊)의 겁해(劫害)를 당하였을 때, 감사하게도 황은(皇恩)을 입어 나에게 의삼(衣衫)과 양식을 주시고, 또 군선(軍船)을 주었으니 견마(犬馬)의 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와서 일본국(日本國) 바다 안에 이르러 배에 물이 새어 풍랑에 표류되어 공구를 잃어버리고 흘러서 해안가에 이르자, 곧 배는 침몰되고 생명만은 보존하였습니다. 또 왜적에게 의삼(衣衫)을 다 빼앗기고, 십분 춥고 얼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그 때에 사신을 차임(差任)하여 군선(軍船) 1척에 태워서 예물을 갖추어 본국에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 국왕이 곧 나를 차임(差任)하여 일본 사신으로 보내게 하였는데, 회례(回禮)하는 배가 풍랑으로 인하여 공구를 잃어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금년 7월에 이르러서야 일본 박다(博多) 지방에 이르러 관부(官府)에서 지체하다가 미처 한양에 들어가지 못하고, 명년 정이월에 이르러 겨우 일본에 들어갑니다. 내가 전년에 귀국의 후한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몸소 친히 나아가서 고두(叩頭)하고 사은하고 싶으나, 국가에서 준비하지 아니한 관계로 내가 미처 나아가서 친히 황은을 사례하지 못하고, 특히 손자 실숭(實崇)을 시켜 방물(方物)을 싸 가지고 나아가서 대신 절하고 성은(聖恩)을 감사합니다. 대인(大人)께서 하정(下情)을 아뢰어 주신다면 고두(叩頭) 고두(叩頭)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전람(電覽)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태종 12년 5월 10일에는 자와국 사람이 판매하는 비로 10필을 사기도 했다.

 

사실 사신의 방문은 두 번이지만 교류는 한차례 더 있었다.

태종실록, 태종 12년 5월 25일 진언상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갔다는 기록 이후로는 아쉽게도 더 이상의 자와국과의 교류는 없다.

 

당시 자와국은 마자파힛 왕국 시대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자와 섬에서 가장 활발한 해외 무역 활동을 벌인 왕국은 마자파힛이었기 때문이다.

 

해상으로 둘러진 자와 섬은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마자파힛 왕국이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 무역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와 섬의 여러 고고학적 유적에서 시대적으로 마자파힛 왕국의 시기와 일치하는 많은 중국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마자파힛과 중국 간의 무역에 대한 증거가 된다.

 

2) 인도네시아 사신 진언상, 그는 누구인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진언상이라는 인도네시아의 한 사신이다. 그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조선에 도착하게 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진언상이라는 사람은 두 번 언급이 되었다. 태조실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면 진언상이 조선을 처음 찾은 시기는 태조 3년(1394년 음력 8월 7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국인 장사도는 예빈경 관직을, 자와인 진언상은 서운부정 관직을 얻었다고 한다.

 

여기서 장사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는 1393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에서 온 사신이다. 1394년 음력 7월 5일 기록에 따르면 1393년 말 조선을 떠났다가 일본에서 해적에게 약탈을 당하게 되고, 그 후 일본에서 머물다 1394년 여름 다시 조선으로 오게 된다. 장사도가 일본에 머물 때 진언상을 만나 함께 조선을 찾게 된 것으로 유추한다. 이것이 실록에 기록된 진언상의 첫 등장이다.

 

두 번째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언상은 태종 6년의 기록을 보면 60명과 출발을 하였으나 약탈을 당하여 40명만이 도착을 하였고, 이를 알게 된 왕은 의복을 주어 보냈다. 그 후 1412년 음력 4월 21일 진언상은 조선에 사자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쳐 은혜를 갚았다.

 

조선땅을 처음 밟은 자와 사람 진언상은 누구인가?

 

자와 원주민이 아니고 자와국 화상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그는 우선 중국이름을 쓰고 있으며 중국어로 소통했을 것이다. 자와 섬에는 광동 지방과 복건 지방에서 온 중국인들이 주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할 만큼 많이 살고 있었다.

 

자와국 화교들은 자와 왕국과 중국 간의 무역 교류를 통해서 경제적 지위를 확보했을 것이고, 자와 왕국도 이들 화상들을 기용하여 왕실 무역, 상인 또는 사신역할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3) 마자파힛 왕국의 문화 유적
조선은 자와국의 어떠한 왕조와 교류가 있었던 것일까?

b4-4우리는 마자파힛(Majapahit)  왕국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마자파힛 왕조라고 추측을 해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다른 왕국들의 해외 무역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며, 이 시기 자와 섬에서 가장 활발한 해외 무역을 벌인 왕국은 마자파힛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자파힛 왕조는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간략히 설명해 보려고 한다.

 

먼저 마자파힛 왕조는 1293년~1500년까지 존재하였으며, 마지막 힌두-불교 왕국이었다. 자와부터 시작하여 수마트라, 말라야 반도, 칼리만탄, 인도네시아 동쪽까지 점령을 했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큰 왕국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면 마자파힛 왕조 때의 수도, 트로울란은 매우 큰 도시였으며 매년 성대한 종교 의식이 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시민들은 불교와 힌두교를 모두 받아들였으나, 이슬람은 제외했다. 하지만 일부의 궁인들은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마자파힛 왕조는 건축물로도 유명한데 사원을 벽돌로 지었지만 건축가들의 솜씨는 전문가 수준이었고, 기하학적으로 훌륭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마자파힛 왕조 시절의 건축요소들은 현재 자와와 발리의 건축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경제적인 측면에 대해 논해보면 마자파힛 왕조는 농업국가인 동시에 상업 국가였다. 농업 국가였던 이유는 지리적인 측면에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브란타스 강과 븡아완솔로 강은 벼농사를 짓기에 탁월하였으며, 농업적으로 풍족함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타 국가들로부터 후추, 소금, 천 등을 수출하고 진주, 금, 은, 철로 된 물건들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은 상업 국가로 왕성히 무역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마자파힛 왕조의 문화 유적을 살펴보자.

 

마자파힛 왕조의 전성기는 오래 전 지나갔지만 위대한 문명으로서 여전히 우리가 볼 수 있고 배울 만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수도 트로울란(Towulan) 지역의 공동체는 여전히 마자파힛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전통 공예를 보존하고 있으며, 벽돌과 금속 가공물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마자파힛의 바틱 직조를 확인할 수 있다.

 

트로울란(Towulan)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틱 중 하나에는 마자파힛의 상징인 태양계를 의미하는 음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마자파힛의 유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사원이다. 사원은 고전 시대 동안 동남아시아에 존재했던 왕국 유산 기념물의 전형적인 건물로, 중부 자와의 보로부두르 및 프람 바난, 캄보디아의 앙코르 및 더 작은 수천 개의 사원들과 같이 주변 지역과 거의 모든 섬에 존재한다.

 

트로울란에 있는 마자파힛 유적지에는 티쿠스 사원, 바장 라뚜 사원, 브라후 사원, 케다톤 사원, 위링인 라완 사원 및 겐통 사원 같이 많은 사원들이 흩어져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은 사원들은 본래의 건축법이 알려지지 않아 의도적으로 개조되지 않았다.
사원은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특정 사건의 상징적 기념물로나 기능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다른 유형의 건물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또 다른 유적으로 테라코타(Terra Cotta) 도자기를 볼 수 있다.

 

‘테라코타’라는 단어는 ‘태운 흙’을 뜻하는 라틴어의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 이 단어는 초벌로 구운 붉은 색 도기의 물체를 이른다. 이 지역의 대부분의 고고학적인 연구들은 폐허 흔적들의 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까지 동부 자와에서는 토기를 굽는 가마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테라코타들은 상대적으로 저온 소성적으로 만들어졌다.

 

장인들은 자기들을 햇볕에 말리는 족자카르타와 발리 인근의 까송지역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방법과 비슷하게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다음으로 자기를 쌀겨와 짚으로 덮고 그 위에 불을 지른다. 더 단단한 자기를 만들기 위하여 불을 지르는 과정은 반복된다. 지금까지 높은 온도로 굽는데 사용되는 가마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석기로 가슴에 물방울이 있는 하나의 조각상으로부터 가마가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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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그릇들은 트로울란에서 발견되어 왔다. 그 그릇들은 물 저장을 위한 것부터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것으로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을 것이다. 큰 항아리 모양에서 박스 모양의 물을 담는 그릇에 이른다. 전형적인 주전자 모양의 자기는 마자파힛 시대의 지역에서 발견되어 오늘날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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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모양의 한 도자기- 수많은 머리모양의 테라코타(Terra Cotta)는 몸통 없이 주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크기의 범위는 3cm부터 10cm으로 다양하다. 이러한 머리 모양의 테라코타는 자바인들의 머리 스타일과 귀 장신구를 보여준다. 많은 이들은 머리와 머리가 없는 몸통의 인물상이 있는 이유가 종교적 제물로 쓰이기 위하여 잘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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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상- 많은 인물상들은 모형이나 종교적 제물로 쓰였음을 암시하며 잘린 채로 발견되어 왔다. 하지만 제작 기술은 또한 그것들을 깨지기 쉽게 만들어졌다. 또 다른 이유는 세속극에 쓰여 일단 부셔지면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 인물상들은 작고 조각술이 사용되었다. 인물상들은 자연스러운 자세와 얼굴 표정을 보이고 있으며, 완전한 인물상은 수많은 머리 없는 인물상과 몸통이 없는 상들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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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모양의 테라코타- 마자파힛의 유명한 동물모양 테라코타 중 하나는 트로울란에서 발견된 돼지 저금통이다. 다른 동물상으로는 난디 황소, 국내의 동물들, 새, 코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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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된 벽돌- 조각된 벽돌들은 일상생활의 모습과 종교적, 문학적 이야기의 묘사를 드러낸다. 이를 만드는데 사용된 기술은 중앙 자바의 보로부두르라는 사원에서 볼 수 있는 조각된 돌 조각에 쓰인 것과 같다. 대부분의 벽돌들은 하나로 되어있으며 보수가 잘 되어있지 않지만, 종종 순서들은 발견된다.
판에 새겨진 인물상은 대부분 완전히 정면을 향한 몸, 4분의 3을 차지하는 얼굴, 다리의 옆모습을 드러내는 동부 자와의 스타일을 묘사하고 있다.

 

4) 조선왕조와 마자파힛 왕조의 교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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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태종실록 1412년 음력 4월의 기록 중 진언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치와 반응이 조선의 대응과는 달랐다. 무로마치 막부는 풍랑으로 배를 잃고 1406년 겨울에 일본에 상륙한 것으로 보이는 진언상 일행을 일본의 선박에 태워 자와 섬에 데려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귀국 길에 일본 사신을 동행시켜 보냈다.

 

무로마치 막부는 또 1411년 음력 7월에 하카다 항에 도착한 진언상이 수도인 교토로 올라와 마자파힛 왕국의 사신으로서 일본의 쇼군을 알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일본의 대응과는 다르게 조선왕조는 진언상이 보냈던 사인들의 부탁을 거절한 이후 더 이상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중국- 
중국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활발히 교역에 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마자파힛 왕조와 중국이 교류했다는 첫 번째 근거는 테라코타 인물상이다. 마자파힛 사람들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의 모습을 만든 경우가 존재한다. 눈의 각도와 뒤로 빗질이 된 머리라는 특징을 통하여 중국인을 나타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 어른의 인물상은 중국 상인들이 쓰고 있던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으며, 남자 인물상은 망토로 온 몸을 감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자료들은 이러한 인물상이 마자파힛 왕조 안에 있던 중국 무역 상인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로는 동전이다. 부서진 돼지 저금통 안에서는 중국의 동전들이 안에 들어있었다. 약 1300년 마자파힛의 첫 번째 왕의 통치 시절, 중국에서 수입해온 ‘uang kepeng’을 상용하였다. 중국 동전을 통하여 동전을 만든 소재와 화폐 시스템의 존재, 무역 관계 또한 파악 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와 섬의 광동 지방과 복건 지방에서 온 중국인들이 주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고 말할 만큼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자와섬 진출은 자와 섬과 중국 간의 무역의 흐름과 더불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와 섬에서 활동하던 화상들을 기용하여 중국으로 보내는 조공선의 선장이나 왕실 무역 상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왕조-
조선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신진개혁세력이 주체이다. 그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해상교류를 등한시 했다. 또한 잦은 해적출연으로 명도정책 해금정책을 더욱 강화해 조선왕조 초기당시 해상국가와 교류는 엄도도 못냈다.

 

고려 공도(空島 무인도) 정책을 계승하고 명나라 해금(海禁) 정책을 이어 받아  개혁파 사대부로 ‘농업이 본업(本業)이고 상공업은 말업(末業)’이라는 농업장려하고 상공업은 억제해야 한다는 이른 바 무본억말(務本抑末)의 경제 이념을 갖고 있다.

 

5)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동질성

6세시 신라시대 부적으로 쓰인 인도네시아 동부자와 인면유리구슬이 경주 대릉원에서 발견되었다<6세기 신라시대 부적으로 쓰인 인도네시아 동부자와 인면유리구슬이 경주 대릉원에서 발견되었다. 자료 kbs>

1990년대 경주 대릉원에서 발견된 인면유리구슬(보물 제634호)의 원산지가 인도네시아 자와섬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동부 자와주 젬바시(市) 래독옴보 마을의 구슬 공방 인면유리구슬은 경주 인왕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구슬과 동일한 제품을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다.

 

6세기 신라 지도층이 부적 삼아 몸에 지니던 인면유리구슬(목걸이)의 원산지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에서 5300㎞나 떨어져 있지만, 이미 1500년전부터 교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산탈춤이나 북청사자놀이 같은 탈춤도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되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노래 박자에 맞춰 손바닥을 부딪치는 인도네시아의 놀이는 우리나라의 ‘푸른 하늘 은하수~’ 율동을 닮았다. 우리의 징은 그들의 ‘공’을 닮았다.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인도네시아팀이 금메달을 싹슬이한 전통무술 ‘쁜짝 실랏’은 우리의 전통 무술 태권과 비슷하다. 한국 무녀가 신내림을 받을 때 작두타기 퍼포먼스를 보이듯, 인도네시아 무녀가 유리조각위에 의식과 관련된 춤을 추는 모습도 우리와 비슷하다.

 

사람이 죽으면 한국은 3일장을 치르고 인도네시아는 무슬림 영향으로 당일 장례문화로 바뀌어졌다.
한국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산모가 미역국을 먹고 인도네시아 산모는 까뚝 잎(daun katuk)으로 국을 끓여 먹는다. 까뚝 잎을 먹으면 모유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난 후 100일이 되면 한국은 백일 잔치를 하고 인도네시아는 40일이 되면 가족기도와 아기의 머리카락을 잘라준다. 여자아이에게 부모가 귀걸이를 해준다.

 

전통 결혼풍습도 두 나라가 비슷하다. 두나라 모두 신부 집에서 결혼하고 첫날밤을 맞는다.

인도네시아 신랑은 신부에게 지참금을 주어야 한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인도네시아도 르바란 명절에 귀향해 성묘하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또한 설화를 보면 한국과 인도네시아 모두 ‘나무꾼과 선녀’가 똑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네시아에는 주변국가의 많은 문화가 숨 쉬고 있다. 동질감을 느끼는 나라는 한국 뿐 만이 아니다. 해상 유라시아 교류의 중심지였기에 많은 나라들이 인도네시아에 가면 “저거 우리나라에도 있는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남의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국가 가운데 가장 큰 국토와 인구를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최대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종족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종교를 받아줘 통일국가를 만들었다.

 

3.결론

 

한인사회, 한인역사 로드맵 제시하라

동포사회 현안으로는 재외동포 거주국가에서 어디서나 외국인에 대한 비자허가 강화와 행정 규제가 심화되고 있다. 해당국 정치인들은 자민족 우선 보호정책으로 여론을 이끌어 가고 있다.

 

국민소득 증가로 중산층과 보수층이 급성장하자 외국인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종교적 원리주의와 지역주의에 편승한 민족주의 강경 극단주의 세력화로 외국인 활동반경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에 재외동포는 한국과 해당국가와 역사적 연관성을 찾아 동포사회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는 말처럼 해당지역 국가와 역사적 연관성을 찾아 내 동질감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한인들이 사실적 역사에 무관심한 태도를 지닌다면 한인동포의 미래 또한 어두울 것이다.

 

동포 거주지역 역사 속에는 동포사회가 현재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해답이 있다. 이를 통해 한인사회 당면한 문제점 해결과 미래에 대한 방향성 제시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생과 조화 그리고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을 발굴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언론과 한인단체가 있어야 한다.

 

독립운동가 장윤원, 1920년 9월 20일 바타비야 첫발…한인진출 100주년 기념관을 세우자

 

2018년은 조선 한국인이 인도네시아에 뿌리를 내린 지 98년을 맞고 있다. 독립운동가 장윤원은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은행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가 적발되어 중국에서 망명 생활하던 중 1920년 9월 20일 바타비아(자카르타 옛 지명)에 첫발을 내 딛는다.

 

이후 장윤원의 차남은 인도네시아 아트마자야 대학의 공동 창립자가 된다. 장녀는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3 등 서기관과 결혼하게 된다.

 

장윤원의 일가는 이후 일본군 군속으로 끌러 온 조선한인의 고려청년독립당원 석방과 2000여 군속 귀환을 위해 재자바조선인민회를 설립하는 등 조국을 위해 힘쓴다.

 

장윤원 인도네시아 진출 100주년을 2년 앞둔 인도네시아 한인동포사회.

 

이제 한인 1세대 기업인과 청년들이 함께 어울려 우리 한인동포 사회에 드려진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어야 한다. 한인 1세대 2세대들이 일구어 놓은 터전을 바탕으로 2~3세대 청년들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한인 진출 100년 장터를 만들어야 한다.

 

2018년은 한민족 인도네시아  진출 100 주년을 준비하는 소중한 해가 되어야 한다. 2019년은 상해임시정부를 세운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도 한국과 인도네시아 역사적 관계성 확립하고, 과거 현재 미래지향적인 한인사회의 비젼을 위해 한인 진출 100주년 기념관을 준비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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