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인

 

“한 번 불렀는데 거절하면 다신 안 부르죠.”

 

한때 누가 만나자고 제의하면 번번이 거절할 핑계를 찾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가 던진 경고였다. 반드시 필요한 만남이 아니면 선뜻 응하지 않았다. 번거로운 시간 낭비로 여겼다. 물론 호의로 연락한 상대방은 불친절한 거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아내 말처럼 나에게 그다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은 당연히 다시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연연하지 않아 별 부담이 없었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었으니 인간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움이라고 믿었다. 의도나 꾸밈없이 솔직한 마음을 토해낸다고 생각했다. 거절하고 싶으면 ‘자연스럽게’ 거절하는 게 맞지 않은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더니 어느날 외톨이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 주위에 제대로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안됐다. 다들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게을렀던 거라고. 소우주라고 할 만큼 복잡난해한 사람을 대충 건성으로 대접한 참담한 결과였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서로 다른 우주들의 정면충돌 상황에서 비롯된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생김새만 비슷한 호모사피엔스지 속은 서로 외계인이나 마찬가지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은 애초에 소통 가능성이 1도 없음을 드러낸다. 인간관계에서 적극성은 본성에 반하는 태도다. 인위적인 의지와 용기를 내야 비로소 이질스러운 타인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다.

 

모든 관계의 본질과 시초는 무조건 수용에 가깝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라. 주체로서 관계를 주도할 능력이 아예 없다. 생존을 위해 부모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먼저 다가갈 능력도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타인을 잘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이를 거부하면 관계는 물론 생존조차 위협받을 수 있다.

 

이제는 누가 만나자고 하면 웬만하면 수용한다. 내가 먼저 다가가진 못해도 최소한 다가오는 상대는 환대하려고 애쓴다. ‘티피오’[TPO: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의복과 태도와 화제를 준비한다. 전에는 무시하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훨씬 바빠졌다. 발품을 팔았는데 양질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어느 쪽이든 배움과 통찰이 있다. 한번 불러서 나갔는데 유쾌한 만남이 되면 나중에 더 좋은 자리에 불러주는 것 같다. 실제 만남뿐 아니라 한동안 뜸하다 싶으면 전화나 카톡으로 안부를 묻는다. 안 할 때보다 인간관계가 한결 두터워진다.

 

최근 들어 나를 자주 소환하는 C는 ‘재벌급’ 관계력의 소유자다. 그에게 관계는 자신의 독점 고정자산이 아니다. 오히려 유동성이 높은 공유자산이다. 아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엮는 걸 즐긴다. 누구를 아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냥 괜찮은 사람 있으니 나오라고 권한다. 둘이 만나면 재미가 없어 무조건 셋은 돼야 한다는 논리다. 그에게는 수용을 넘어 타인이라는 ‘외계인’에게 가까이 가는 용기가 있다. ‘한번 거절하면 다신 안 부른다’는 아내의 경고에 겁을 먹은 나는 C를 통해 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덕분에 깡마른 인간관계에 제법 살이 올랐다. C처럼 관계력이 강한 유형은 여러 사람을 자신의 관계망 안으로 끌어들인다. 입체스러운 관계 클러스터로 확장한다. 재미와 유익이 기하급수로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타인과의 관계가 모든 인간 고민의 근원이라면 해결책 역시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나도 C처럼 타인의 이름을 먼저 부르며 다가가는 ‘용기인(勇氣人)’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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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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