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광장>은 지난 4월 말 한국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34년전 프랑스로 입양된 자매를 찾아달라는 생모의 부탁이었다. 마음만 앞서 무조건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매의 사진과 정보를 받아, 본지 사이트 및 SNS에 게재를 했다. 이후 프랑스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나 가족 측에서 찾는 경우는 제약이 있었다. 함부로 입양인들의 정보를 드러내면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의 예로, 그 지인은 같은 경우로 입양인을 찾아주었는데, 입양인이 친부모를 찾을 생각이 없었던 터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어린 시절 정보를 모두 내리지 않으면 법적 대응하겠다고 했다면서, 아주 조심스러운 일임을 알려주었다. 이는 입양인의 선택권 존중에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입양인이 부모를 찾는 경우는 제약이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제약이 따른다. 당시는 좋은 일이라며 열심히 찾을려고 한 것이 무모하고 편중된 생각임을 깨닫고, 사이트 및 SNS에 올린 사진과 정보를 모두 내렸다. 그리고 이건 본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켠에 찜찜함이 더해 왔다. 주어진 일을 끝맺지 못한 것 같은 불편함일 수도 있겠고, 한국이 키우지 못해 그 어린 나이에 머나먼 나라, 프랑스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게, 나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해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프랑스로 입양을 보냈겠지만 찾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궁리해본 결과, 직접 입양된 지역으로 가서 수소문해 보는 것이었다.
그곳은 파리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주민이 160여명 남짓한 아주 작은 마을이다. 방법은 시청이나 지역 경찰서에 문의를 해 보고, 동네의 연세 있는 어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집집 마다 초인종을 누르든지, 아니면 거리를 지나가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만들어온 전단지를 보여주면서 34년전에 이곳에 입양된 동양인 자매를 아냐고 하는 것이었다.
보통 당시에 마을에 한국 소녀들이 입양되어 왔다면 소문이 파다하게 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시청은 매일 문을 열지 않았다. 오후에 도착하니 시청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 오전까지만 업무를 보았던 것이다. 인터넷 상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시청 업무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7월, 공해 없는 시골의 내리쬐는 햇살은 유난히 뜨거웠고, 그 작은 동네에는 지나치는 주민 한 명 없었다.
인근 지역의 시청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관할 지역 시청에 문의해 보라고 한다. 입양인이 아닌 가족 쪽에서 찾는 것이라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어떤 경계나 거부의 형태가 있을 수도 있음을 짐작하고 가본 곳이었다. 시청 사람들은 아주 친절했고, 도와주려고 했다. 아이들 사진이 들어 있고, 연락처가 있는 전단지를 시청 게시판을 열어 붙여 주었고, 전단지 일부는 다른 광고지들 있는 곳에 놓아두어도 된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의 협조
그리고 지역 헌병대를 찾았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한 경찰은 시청이나 지역 상가를 공략해 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을 감동케 했던 것은 지역 주민들이 본인들 일처럼 알아봐 준 것이었다.
인근 지역의 한 고서점에 들어가 입양 자매를 찾는다고 이야기를 하니, 나이 많은 서점 주인은 ‘이 전단지를 진열창에 붙이면 되는거지요 ?’ 라고 한다, 그러면서 노란 종이에 본인 이름과 전화 번호를 적어서는 건네준다. 별 말 없던 서점 주인은 묵묵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그의 서점 진열창에는 자매 찾는 전단지가 바로 붙여져 있었다.
인근 시청 옆 까페 여주인은 우리의 사연을 듣자 마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떤 이에게는 까페로 바로 오라고도 했고, 자매가 학교를 다녔을 것을 짐작하고 그 지역 은퇴 교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 퇴직 교사는 지역 박물관에 있는 특산물 코너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퇴직 교사 또한 알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입양 지역에서 정원사로 일하고 있는 이에게 연락을 해보았고, 알만한 사람들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 알아봐 주었다. 손님들을 대하면서 짬짬히 우리 일을 봐주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입양된 아시아인 자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 그날 저녁 모임이 있는데, 아마 입양된 지역 시장이 참여할거라고 하면서 이야기해 보겠다고 한다. 성과가 있든 없든 다음날 꼭 전화를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입양된 지역으로 돌아갔다.
우체통에 전단지를 넣고,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면서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자매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계속 살고 있었던 노인들도 모른다고 한다.
좌절과 실망감에 내리쬐는 햇살은 숨막히게 무더웠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 날밤, 입양된 지역을 잘못 알려준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시골에 동양 여자 아이들이 입양되어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좌절과 포기에서 실마리가 잡히기까지
지명이 비슷한 곳들이 있기에 그쪽 지역을 검색해보았고, 날이 밝자 마자 한국의 생모와 연락해서 입양 지역의 정확한 지역 이름과 지역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해 봐 달라고 했다. 통화를 하는 사이 까페 여주인이 우리를 보고 다가와서는 다른 일행에게 이야기 하기를, 오늘 아침에 까페가 자주 오는 이가 다녀갔는데, 전단지를 보더니 주저없이, 예전에 이 집에 공사를 했는데, 한국 아이를 입양했고, 양부모 직업까지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모든게 맞아떨어졌다. 드디어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까페 여주인은 손님들이 많아 진지하게 이야기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공사한 이의 연락처를 인터넷으로 찾아 전화해 보았으나 받지 않았다. 주소가 있기에 찾아가니 아무도 없어서 전단지를 붙여놓고 꼭 전화 좀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왔다.
지역 시장과의 만남
주민의 도움으로 시장 집을 알 수 있었고, 찾아가니 시장은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매들의 생년월일 등 필요한 정보들을 주었고, 시장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경계하지 않았고, 될 수 있으면 도와주려고 했었다. 누구길래 찾냐고 묻지도 않았고, 자매들과 친척 관계냐고 묻는 이들은 있었다.
지금 <파리광장>은 시장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파리광장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