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태어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 주부라는 역활은 주역임이 분명하다. 그 주역에서 밀려난지도 오래다. 아줌마라는 호칭이 할머니로 바뀌었다. 검던 머리에는 흰서리가 내렸다. 윤끼나게 매만졌던 얼굴엔 구겨진 얼룩무늬 주름살로 뒤덮혀간다.
칠십년을 넘어살면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데 모습인들 오죽하리. 덤? 시장에서 찬거리 살 때, 한줌 더 얹어주며 덤이라고 하면 그건 공짜같아 기분이 좋았다.
인생에도 덤이 있다니... 괜찮은 말인 것도 같다. 치룬 값어치는 다 살고 공짜로 더 얻은 삶이란 말인가. 요즘은 백수 시대라 덤 치고는 너무나 후할 수도 있는데...
훌훌히 잎새 가지 다 떨구고 호젓이 남아 혼자 서 있는 겨울나무, 덤으로 사는 삶은 그렇게 거칠 것이 없어 자유롭긴 하다.
버팀목이 될만한 여력도 잃었으니 귀찮게 기대는 사람도 없다. 특별한 역활이 없다는게 아쉬울뿐이다. 동동거리며 바쁘던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건 외로움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외로움 속에서 산다고 한다. 젊었을 때 와 또 다른 이 외로움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뼛속으로 스며 드는 한기는 아마도 벼랑끝의 인생을 사는데 최악의 고통이라고 생각된다.
밤이면 빛나는 별들과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며 언제인가 내가 갈 하늘나라 이야기를 듣는다. 날아가는 새들을 불러들여 맘속에서 벗을 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유년시절. 양손에 담배갑을 들고 어느쪽이 더 무거우냐? 국민학교(초등학교)시험을 치루고 입학했다. 2학년이 됐을 때 8.15해방을 맞았다. 너무나 싫은 ‘싱에이’라는 일본 이름을 안쓰게되어 제일 좋았다. 우리 글을 찾아 배우면서 완전히 깨우치기도 전이었다. 어느 여름 방학때 숙제중에 일기 쓰기가 있었다.
방학인데 신나게 놀아야지. 숙제같은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매일같이 강뚝에서 뛰어놀았다. 더워서 땀이나면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 시원하게 물장난을 했다. 마포가 고향인 내게 한강은 어릴적 좋은 놀이터였다.
개학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몰아서 숙제를 해야했다. 매일 매일 써야하는 일기가 제일 골치아픈 숙제였다. 머리를 짜내어 이야기를 만들어 썼다.
어느 날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외할머니 집에 갔었다고도 썼다. 또 어느날은 언니를 도와 방 청소를 했다고도 썼다. 막내 외삼촌과 어울려 노는 오빠를 따라 나섰다가 꿀밤으로 혼난 얘기도 썼다.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서 날짜맞춰 쓰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그게 내 글쓰기에 시작이었던 셈이다. 거의 창작으로 그럴듯이 일기 숙제를 해 갔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꾸며 쓴 일기가 탄로날까봐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그 때 앞에 세워놓고 참 많은 칭찬을 해 주셨던 선생님. 처져있던 어깨가 쭉 펴지고 많이 으쓱했었다. 아마도 그 때 선생님의 칭찬이 머릿속 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본다.
직장에 근무할 때도 틈만나면 사보에 글을 써 보냈다. 내 마음을 옮긴 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채택되어 멋진 활자로 책이 되어 나올 때. 그 환희로움을 뭐라 표현해야 할런지. 너무나 멋지고 기분좋은 경험이었다.
결혼해 살면서 남편과 다툼이 있어 속이 상할 땐, 물 젖은 손을 털고 이불 속 에서 맘대로 못다한 분풀이를 글로 끄적이며 잠이 들었다. 삶이 고달퍼서 지치고 힘들 때도 누구에게 호소하듯 그 심정을 글로써 달랬다. 어둡고 우울한 표정 남에게 들키지않고 밝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스스로 아픔을 치유해 가면서 서서히 글 공부 복습도 된 셈이다. 심심한 어느 날 흥분해서 써놓은 걸 꺼내 읽어보면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 소견좁은 남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후끈 볼이 달아오른다.
“어이구 챙피해라. 별걸 다 가지고 속을 끓였네”
왜 그리 치졸해 보이던지 누가 볼세라 후다닥 찢어버렸다. 그런걸 수도 없이 반복하며 살았다. 젊은이에게 인생이란 장미빛 꿈과 새파아란 희망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의 문을 두드리던 어느 아가씨가 있었다. 할만큼 해봤는데 영 기회가 오지않아 거의 좌절해서 의욕마저 잃고 우울속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천 세대가 넘는 대단지 새 아파트에 입주해 살던 때의 일이었다. 관리실 옆에 마련된 유치원이 무슨 이유인지 문을 못 열고 비어 있었다.
벼르고 벼르던 차에 어느 날 단지 대표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 추천할만한 적임자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시면 어떻겠느냐고?. 아이들이 많은데 유치원 을 언제까지 그냥 놔둘거냐고 채근도 곁드려서 구구절절 썼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않아 반가운 소식이 날아 들었다. 관심을 가져주어 고맙다는 인삿말이었다.
잊어갈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아가씨가 유치원을 맡아 오픈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왔다. 참으로 기뻤다. 그동안 글쓰기 실력이 제법 늘어 백 일장에 따라다니며 몇차례 상을 타기도 했지만 그 때의 결과를 가장 큰 보람으로 잊을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르는 큰 사업이었다. 아마 타이밍을 잘 맞춘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공감하고 인정 해준 사실만은 틀림없기에 큰 상을 받은 것처럼 행복했다. 유치원 마당에 꽃잎처럼 흩어져 노는 아이들 모습을 삼층에서 내려다보며 나만의 특별한 미소를 머금는다. 멋지게 원장님이 되신 아가씨의 바쁜 일상도 참 보기에 좋았다.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을 한게 예순 두 살 때다. 많이 늦둥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한다고 많이 쓰기는 했는데 부족해서 늘 부끄럽다. 글이란 읽는 사람이 공감하지 않으면 무의미해서 가치가 없다고 한다. 솔직하게 써야하기에 때로는 알몸을 드러내는 것 같아 챙피하기도 하고 고통스럽다. 글쓰기란 그래서 정말 어렵다.
긴 세월 꾸준히 참 많이도 끄적여왔다. 요즘은 작품성을 떠나서 건강관리 차원으로 목적이 바뀐게 아닌가 불안하다.
욕심일까? 마음은 열여덟 청춘. 의욕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여건이 따라주질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제 나이먹어 늙었으니 그냥 놀면서 살아도 되지 않느냐고 옆에서 예쁜 충고도 해 준다. 바쁘게 사느라 미루었던 하고 싶은 일들.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기가 사실은 지금인데... 금쪽같은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먹고싶은 것 실컷 먹고.
하고싶은 것 다하고.
가고싶은데 가고.
보고싶은 사람 보면서 사는 것.
그게 노후의 인생이란다.
삶의 벼랑끝에서 애절하게 읊어보는 마지막 구호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어차피 인생이란 공식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한 사람들의 마지막 절규가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하고 살아 조금은 위로가 된다.
이제 가슴 속에 평생 응어리는 그동안 써 온 글속에서 용해되어 몽땅 사라져 버렸다. 작품 하나하나를 낼 때마다 들이는 정성만큼 내 영혼은 깨끗하게 정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켜켜히 쌓여진 먼지를 훌훌히 털어낸 듯 내 맘속엔 이제 티검불 하나 남은게 없다. 긴 세월 미움도 원망도 저주도 아픔도 슬픔도 깨끗하게 휩쓸려 나갔다.
이제 따뜻한 사랑 하나 가슴에 남겨두고 그렇게 가볍게 살아가련다. 내게 고마웠던 사람들, 정들어 행복 했던 사람들, 감사하며 평화롭게 늙어 가련다.
긴세월 수많은 작품들은 내 일생에서 다시 깨어난 영혼을 마알갛게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칼럼니스트 오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