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 (하늘밭교회)
<바보들이여>
하느님의 바보들이여
어떤 일이 있어도 늙어서는 안됩니다
언제까지라도 젊어야 합니다
싱싱하게 젊으면서도 깊어야 합니다
바다만큼 되기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마는
두세 키 정도 우물은 되어야 합니다
어찌 사람뿐이겠습니까
마소의 타는 목까지 축여주는 시원한 물이
흥건히 솟아나는 우물은 되어야 합니다
높은 하늘이야 쳐다보면서
마음은 넓은 벌판이어야 합니다
탁 트인 지평선으로 가슴 열리는
벌판은 못돼도 널찍한 뜨락쯤은 되어야 합니다
가는 길손들 지친 몸 쉬어갈
나무 그늘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덥썩 잡아주는 손과 손의 따뜻한
온기야 하느님의 뛰는 가슴이지요
물을 떠다 발을 씻어주는
마음이야 하느님의 눈물이지요
냉수 한 그릇에 오가는 인정이야
살맛 없는 세상 맛내는 양념이지요
이러나 저러나 좀 바보스러워야 합니다
받는 것보다야 주는 일이 즐거우려면
좀 바보스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보스런 하느님의 바보들이여
문익환 목사님의 '하나님의 바보들이여'라는 시입니다. 몇 년 전 제 글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책이 되어 나왔을 때 책의 제목을 '바보새의 노래'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책이 이미 있었습니다. 함석헌님의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바보새'라는 것을 꼭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바보새 되어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바보새로 살아가려는 제 결의를 담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보가 되는 길을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바보가 되기에는 제가 너무 영악하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무엇보다 억울함과 무력함을 감내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덜 익은 풋 과일이었다는 걸 최근의 삶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나 가진 것이나 이룬 것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바보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음을 실천하는 삶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복음이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애초부터 그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에서 문익환 목사님은 받는 것보다야 주는 일이 즐거우려면 좀 바보스러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어쩌면 문 목사님은 독자들과의 공감을 위해 가장 쉬운 예를 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긍정이 대세인 세상에서 부정을 요구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사고의 영역만을 됴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아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고, 실제로 복음은 우리에게 죽을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12:24)
좀 바보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미쳐도 단단히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린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바보가 되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성이 정비례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좀 정도가 심한 바보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스스로를 좁쌀 한 알이라고 부르는 장일순 선생입니다. 그분은 한 농부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듯하게 말해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
분명 성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5:39)
장일순 선생은 이 본문을 잘 풀어서 말한 것입니다. 물론 말로 설명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실제로 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일순 선생은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썼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의 일화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시골 아낙네가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둔 돈을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달라고 선생님께 매달렸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가셨습니다. 원주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노점상들과 애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그 시골 아주머니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냈습니다. 거기다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줬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님은 가끔 원주역에 나가셨는데, 그것은 그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소매치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네.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 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것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일절 하시지 않았습니다.
(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출판사)
참으로 감동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움부리아의 작은 예수 프란치스코 이야기의 한국판 같은 내용입니다. 장기려 박사의 도둑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듯이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영성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린 이런 사람들에게서 바보라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복음이 가지는 위대한 변화의 파괴력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소매치기가 계속 소매치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비록 추정에 불과하지만 그 소매치기는 자신의 소매치기업을 계속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의 행동이 소매치기로 하여금 스스로 소매치기가 잘못된 것임을 자각하도록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일 순 선생은 소매치기에게 복음을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복음을 살아 보여줌으로써 그를 변화시켰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똘똘한 사람들, 많이 아는 사람들, 학위를 가진 사람들 등등의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살아 보여줄 수 있는 바보들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 한국교회의 불행한 현실의 진짜 이유입니다. 오직 바보들만이 복음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보스런 하나님의 바보들이여"
이 한 마디에 담겨 있는 문 목사님의 애절한 염원이 제 마음에 전해집니다. 그분의 외로움이, 아니 예수님의 외로움이 제 가슴을 에도록 사무치게 합니다. 이 시대 바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있기는 한 것일까요?
"동성애 막아야 합니다! (아멘!) 차별금지법 막아야 합니다! (아멘!) 샤리아법 막아야 합니다! (아멘!) 수쿠크법 막아야 합니다! (아멘!)"
이렇게 소리 소리 지르며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세인 이 땅에 정말로 늙지 않는 양념 같은 바보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무 그늘이 되어 원수 없는 평화로운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바보들이 '날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듯하게 말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