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2015년에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을 반영해 0세부터 17세까지는 미성년, 18~65세는 청년, 66~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세대로 구분했다.
수명이 60~70세이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60세 이후의 40년 가량의 시간을 청년으로, 중년으로 어떻게 보내야할 지를 고민해야하는 시대인 것이다. 은퇴 후의 노후생활에 필요한 자산과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야 하는 시대에 맞추어 ‘제 2의 인생’, ‘이모작 인생’이란 말이 흔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제2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지표를 다시 세워 만들어야 할 용기와 열정일 것이다.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 하며 늦었다는 생각 대신 변화를 준비하고 변화에 맞추어 살아야할 태도와 풍요로운 삶을,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을 위해서 말이다.
올해 59세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 온 이관영 씨를 만났다. 앞으로 40살을 더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기회로 보고 가능성을 키워나가는 삶을 실행으로 옮긴 장본인이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용감하게 온 그는 나이든 사람의 경험과 지혜와 여유를 다 가진 시기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 프랑스에 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학업을 마치고는 한국으로 돌아와 금호아시아나 항공그룹의 계열인 금호석유화학 회사에서 20년 넘게 근무를 하고 퇴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충남대학교에서 대기업 근무 경험으로 교양강좌를 맡아 현장실습, 리더십 강의 등 실무에 필요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 프랑스에 유학하게 된 동기는요?
회사에 다니면서 장영실 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대기업에서 상무, 본부장 등을 역임도 하고, 업적과 성과가 함께있던 보람 있는 직장생활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을 하고 노후를 위한 준비도 할 수 있는 사회생활을 한 좋은 삶이었지만, 이 삶은 여기까지만 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죠. 조직 속의 일원으로, 연구원으로 늘 규율, 조직, 팀으로 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제 2의 인생을 살고 싶은 거였죠.
퇴직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구체적인 유학 준비는 대학에 있을 때였습니다. 회사와는 달리 학교는 시간적 여유가 많더군요. 이때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보르도의 와인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한 서류준비도 했습니다.
금호그룹을 나와 계약직으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었을 때가 55살이었습니다. 이제 59세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 그림이 아닌 와인공부 부터 시작한 이유는요?
어느 날 화가인 친구가 과학자들이 가진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라면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적극적인 권유를 했습니다. 평소에도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 전시장을 자주 찾고는 했는데 권유를 받고 보니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초.중.고 다닐 때 학교 수업으로 그림을 그린 것 밖에 없는 저로써는 인물을 그린다는 것이 엄두가 안났었지요. 그런데 친구가 인물 말고 아이디어로 그리면 된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면 된다고 격려를 해주어 용기가 생겼습니다.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시작하니 재미가 있더군요.
프랑스를 선택 할 때는 미국은 이미 공부하며 살았던 곳이라 낯선 나라에서 다른 언어를 배우며 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잖아요.
그림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하기에는 언어에 자신이 없어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 배우면서 프랑스어와 문화에 접근하기로 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와인 동호회 활동을 해온 만큼 와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니 이제 그리기 시작한 그림보다는 잘 아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하면 더 수월하겠다고 믿었던 거죠.
그리고 와인은 제게 다양성을 상징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기후, 토양, 품종 등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습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이나 스위스의 와인이 뛰어나도 기후로 한정적인 와인만을 생산하죠. 칠레나, 호주와 같은 곳도 마찬가지이구요. 프랑스는 부르고뉴, 보르도, 지중해 연안, 알자스 등 지역별로 특징이 다르듯 맛이 다 다릅니다. 세계적으로 프랑스 와인이 인정받는 것은 이런 다양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제게는 그것이 와인이고, 그중에서 프랑스 와인이 이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죠. 다양한 스타일, 개성의 맛과 향은 제 감수성을 채워주고 일깨워주어 그림에도 도움이 됩니다. 젊은 학생들과 와인 공부를 하며 와인 샤또를 방문하고 시음하면서 다방면으로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 보르도에서의 1년이 프랑스어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되셨겠네요?
제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언어에 재능이 없는지 중.고등학교 때도 영어가 가장 어려웠어요. 그만큼 미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 정말 힘들게 배웠습니다. 30년 전에는 미국에서 한국의 위상도 높지 않을 때라 아시아인으로 미국사회 진입이 쉽지 않았던 때였지요. 이런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언어 습득은 물론 생활도 어려울 것을 각오하고 왔습니다.
의사소통이 쉽지 않으면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보르도에서는 지방이라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 프랑스어에 더 집중을 했지만 더디게 프랑스어가 늘어 소통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파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 소통을 하는데 수월하지만 가급적 영어보다는 프랑스어로 하려고 합니다.
● 파리에서의 생활은 어떠신지?
파리에 와서는 국립미술학교(보자르)에서 공부하고 싶어 소르본 어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아뜰리에에서 누드 크로키를 배웠습니다. 1년 동안 열심히 했더니 인물을 그리기에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수채화에서 더 나아가 유화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기쁨에 힘들었던 시간들이 봄 눈 녹듯 사라져 매일 그리고 있으며 8월에 한국에서 전시도 할 예정입니다. 만족감이 충족되는 일을 찾은 것은 행운이자 감사할 일로 여겨질 만큼 지금의 생활이 좋습니다.
어학원이 방학일 때는 혼자 모로코, 튀니지를 비롯해 가까운 유럽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언어 배우기, 그림 그리기 등 모든 것이 제게는 새로운 것으로 하면 할수록 조금씩 늘어가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파리에서의 다른 즐거움은 철학카페, 사진 동호회 등에 참석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보르도에서는 제 언어실력이 부족해 쉽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어느 정도 프랑스어 구사가 가능해져 소통의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아 좋습니다. 나이든 사람에 대한 배려, 존중과 같은 격식이나 거리감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라 편합니다.
지금은 프랑스 역사, 문화, 정보 등을 읽는 것이 수월해지면서 식견을 넓혀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 8월에 전시를 하신다고 하셨는데요...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5년이 되어갑니다. 처음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가 했는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제가 살아온 경험이 이미지가 되어 표현하게 되더군요.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림을 그리다 보니 또 다른 세계의 이미지가 나와요. 제 2의 인생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삶과, 그 삶을 위해 시작한 그림 그리기, 그림에서 표현하는 이미지들이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나를 찾아가는 길의 안내자이자, 화가의 길을 걷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의 소재인 ‘나무’가 매개체이구요.
대학 내에 숲이 있었어요. 숲을 산책하면서 똑같은 장소, 똑같은 나무라고 해도 늘 다르게 보였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나무도 그릴수록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처럼 나무와 제 관계는 제가 나무이고, 나무가 저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며 저를 찾아가는 것이죠.
늦게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것을 살면서 보고 느끼고 이해한 경험들이 응축되어 표현될 때 실감하고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어려울 때도 많지만 그만큼 충족감이 아주 큽니다. 조직생활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사는 저와 새로운 대면의 시간으로 자유로운 생활 속에서 열린 시각으로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중이라 무척 행복합니다. 한국에서의 편리한 생활 대신 장기체류를 위해 비용을 줄이며 최대한 절약하며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 지금의 생활에 만족합니다.
제 그림을 본 사람이 전시 제안을 해왔을 때 너무 이른 것은 아닌지 주저도 되고 일반인에게 선보인다는 것에 겁도 났습니다. 화가의 길을 가려면 “전시는 과정으로, 한 단계 도약을 위해 필요하다. 가야만 할 길이라면 해보는 것이 좋다.”는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전시는 ‘숲’으로 구하갤러리(서울 강남구 논현로 149길 65)에서 8월 13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릴 예정입니다.
전시를 위해서 몇 개월 전부터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 잠이 많이 부족하지만 첫 개인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의 여정은?
파리 보자르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제약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Académie Charpentier에 준비과정인 Prèpa Ècoles d'Art/Première année에 등록을 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전시를 잘 끝내고 돌아와 다시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겠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막막함 대신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았고, 그만큼 행복한 생활을 자유롭게, 내 삶의 주인이 되어서 계속 사는 것이죠.
【프랑스(파리)=한위클리】 조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