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소식을 전하는 방송을 듣고 있는데.... 앵커와 패널이 주고 받는 내용 중에...
''만나고 싶을때 항상 만나게 못합니까?''
''아 그쪽에 사정이 있나 봅니다. 우리는 전산화가 되어 있어 바로바로 이름만 넣으면 찾지만 북은 그렇지 못한가 봅니다.''
오랜 기자 생활을 한 사람들이 정말 왜 그런지 몰라서 저따위로 이야기를 할까?
저사람들 말대로 북은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인적사항을 넣으면 쉽게 찾지 못한다.
그들 말대로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산화할 자료에 그들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쟁 후 사라져버린 이들.
전쟁 후 한국으로 말하면 호적에서 사라져버린 이들.
그들이 바로 월남했거나 남쪽에 남은 이들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북은 그야말로 초토화(焦土化) 되었다.
북은 소위 말하는 융단폭격과 네이팜탄 사용으로 북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평양의 경우 2채의 건물만 남고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소개한 신문 기사를 인용한다.
<북진하던 유엔군이 대거 참전한 중국군에게 참패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1월 5일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삼아 초토화시켜라"
이때 등장한 폭탄이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소이탄과 네이팜탄이다.
가솔린이 섞인 이 폭탄들은 터지면 직경 약 45미터의 둥근 지역을 모조리 태웠다.
이때부터 유엔군 북쪽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모든 지역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했던 2차대전과 달리, 북한에서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폭격의 패턴은 먼저 중폭격기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면, 이어 전폭기가 나타나 화재 진화를 못하도록 기총소사를 하고 시한폭탄을 뿌렸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는 전선이 교착되자 미 공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보급을 끊기 위해 북한전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파괴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협상이 중단되자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모든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동시에 폭격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수력발전소와 논농사에 필수적인 저수지를 대거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풍발전소를 시작으로 부전, 장진, 허천발전소 등이 무너졌다.
곡창지대인 해주의 경우 저수지 20곳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둑이 파괴돼 마을이 물에 잠기고 벼농사가 중단되었다.
포로수용소를 나온 미 24사단장 딘 장군은 "희천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도로와 2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가 사라졌다. 건물은 공터 아니면 돌무더기만 남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텅 빈 껍데기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 노컷뉴스 기사 중
사정이 이런데 무슨 기록이 남아 있었겠는가?
남도 마찬가지였지만 북은 전쟁 후 대대적인 호적 정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호적정리라기보다는 다시 기록을 만드는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당시 가족들 중 남에서 공부를 하느라 남쪽에 거주하고 있었거나, 남으로 내려간 경우 북의 가족들은 돌아올 피해를 우려해 가족사항에서 그들을 신고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만들어버렸다(남의 연좌제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그렇게 이남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그들의 기록에는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록에 없는 이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낙후(落後)되어서가 아니라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은, 낙후되어서가 아니라 그런 이유로 가족찾는 신청이 들어오면 관계자가 직접 신청자가 적어준 월남 당시 주소를 찾아가 확인을 하고 수소문을 한다.
많은 경우 호적에도 없고 가족들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니 기록도 없고 가족들도 그런 사람을 모른다 하니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가족들을 찾아가고 또 찾아가 설득하고 설득한다.
그렇게 해서 가족이 확인되면 이제 이상 가족 상봉이 추진되는 것이고 방북이 허용되는 것이다.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것.
가슴에 한으로 맺히고 맺힌다.
만날 수 없다는 것.
그 안타까움이 병이 된다.
1970년대, 많은 이들이 미국을 통해 북의 가족 소식을 듣고자 미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1980년대 부터 방북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특히 1990년대 많은 재미 동포들이 가족들을 찾아 북을 방문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실화를 소개한다.
당신 필라에 거주하던 ㄱ모씨와 ㄴ모씨....
두 분은 모두 가족들이 북에 남아 있고 혈혈단신(孑孑單身) 남에 있게 되었다.
두 분은 미국에서 방북을 통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사실 지창보 교수가 1971년 방북하여 가족상봉을 했다. 지교수의 부모님은 앞에 언급한 미군의 평양폭격 때 집이 전소되어 자취도 없이 돌아가셨다.)
처지가 같은 둘은 서로 형제처럼 의지하고 살았다.
이들은 이민 후 자리가 잡히자 당시 가족찾기를 하던 이들을 통해 신청을 했고 그 중 ㄱ씨가 먼저 가족을 찾게 되어 방북을 통해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다.
ㄱ씨가 방북하기 전 ㄴ씨는 북엘 가거들랑 나의 가족도 좀 찾아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ㄱ씨는 ㄴ씨의 가족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돌아왔다.
ㄱ씨는 그후 북을 갈때마다 ㄴ씨의 소식을 안내원을 통해 알아봤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그런데 3번째인가 북을 방문했을 때 안내원으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ㄴ씨의 가족을 찾았는데, 분명 ㄴ씨의 가족이 맞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 ㄱ씨가 안내원과 함께 ㄴ씨의 가족을 방문했고 안내원이 결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임을 몇번이나 설득하였다.
그러자 ㄴ씨의 아버지가 밖에다 큰소리로 "여기 닭 한마리 잡으소"라더니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내 아들 맞습니다, 내가 그 놈 애비요"라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전쟁 후 호적정리 당시 남에 있는 아들의 존재가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호적 재정리 때 신고하지 않고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ㄴ씨는 방북하여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만나고 돌아왔다.
사정이 이럴진데 그 무슨 전산화가 이루어졌네 안이루어졌네가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정말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전산화가 되고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자료에 없는 이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지금도 이들이 가족상봉을 위해 북의 가족을 찾는 방법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제발 북을 얕보고 비아냥 거리는 짓들 좀 그만했음 좋겠다.
진보적 언론들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저 눈물겨운 이산가족 상봉을 보고....
머리에 백설(白雪)을 이고 눈물을 흘리는 저들을 보고,,,
어찌 그런 말들이 나오냔 말이다.
글 이하로 뉴스프로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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