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베트남 호치민의 고급 몰인 빈컴센터 ‘이니스프리’ 매장. 한국 배우 이민호가 그윽한 눈빛을 보내는 광고판 뒤로, 전 호우 리인 품(37·여)이 립스틱을 집어들었다. 그는 이니스프리 립스틱 색깔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했다. 립스틱 이외의 화장품은 프랑스 브랜드 ‘클라란스’와 미국 브랜드 ‘에스티 로더’를 쓴다. 그는 “한국 화장품이 전체적으로 품질이 좋다. 하지만 이니스프리 외에 다른 한국 제품은 내 피부에 맞지 않아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품은 1998년 베트남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국 드라마 <모델>의 주인공 김남주를 좋아했다. 한때 한국 화장품 브랜드를 다 써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별 관심이 없다. 이유를 물었다. 품은 “그때는 대학생이었고, 지금은 아이 엄마니까”라고 말했다.
같은 매장에서 피부케어 제품을 구매한 보 휜 탄 뚜(18·여)는 빅뱅과 2NE1, iKON 팬이다.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는 게 이니스프리 매장을 찾는 데 영향을 미쳤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다. 그냥 여기 제품이 좋아서 온 것”이라고 답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와 K팝, 한국 기업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97년 한국 드라마가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것이 베트남 한류의 시발점이다.
드라마와 K팝을 넘어 한국 패션과 화장품의 인기는 20여년째 이어진다.
드라마에서 본 서울과 남이섬, 제주도를 가고 싶어 하고,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는 집도 적지 않다. 삼성과 LG 현지 공장은 베트남 경제의 버팀목이다. 그만큼 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다.
호치민의 대형 쇼핑몰 빈컴센터 이니스프리 매장에서 손님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응우옌 김 아잉(24) 자매가 하노이의 한인마트인 K마트 내 분식 코너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와 아이돌의 인기가 한국산 제품 구매로 이어진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12살 때부터 동방신기를 좋아한 원 단 미(25)는 방탄소년단(BTS)의 광팬이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인 ‘V-LIVE’에 올라오는 한국 가수가 누군지 줄줄 외고 있다. 그는 필요하지 않은데도 BTS와 연관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폰 케이스와 라인 이모티콘을 샀다. 그는 “요새는 아이돌그룹 ‘워너원’이 대세”라며 “ ‘워너원’으로 모델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노이의 한 CGV에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온 팜 쾅 응옥(20)은 “한국 드라마와 K팝에 친숙한 느낌이 CGV를 찾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 <탐정>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CJ E&M에서 일하는 응우옌 흐엉 리(22)는 “한국 드라마가 좋아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한국 기업 취업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하노이의 한 파리바게뜨 매장에서 호 링 치(22) 자매가 밀크티를 마시고 있다.
하노이의 돈치킨 매장에서 응우옌 밍트(15·왼쪽 검은색 옷)가 가족과 함께 해물파전을 먹고 있다.
한국에 대한 호감이 한국 제품 구매로 온전히 이어지고 있을까. 한류 ‘덕’을 많이 본 제품 중 하나로 ‘K뷰티’가 꼽힌다. 하얀 피부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 화장품의 품질을 신뢰한다. 빈컴센터의 라네즈 매장에서 9년째 일하는 팜 테이 트위 린(26)은 “한국 화장품을 어떤 연예인이 광고하느냐보다는, 그 제품이 자신의 피부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장을 다시 방문하는 이들도 한국 제품이 좋아서 오는 것이지 모델 때문은 아니다”라고 했다. 20~30대는 대부분 한국산 화장품인지 알고 찾지만, 40~50대는 한국 제품인지 모르고 구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6년 베트남에서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인기를 끌면서 배우 송혜교가 모델이었던 라네즈 립스틱이 주목을 받았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베트남 여성은 “송혜교가 광고하는 립스틱이 분홍색이었다. 송혜교가 광고해서 사봤는데, 분홍색은 나한테 안 맞더라. 그래서 더는 안 산다”고 말했다.
응우옌 쑤원 허우가 하노이에서 기아 K3 차량으로 택시 영업을 하고 있다.
한국인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을 모델로 한 광고가 하노이의 한 택시에 부착돼 있다.
K팝의 주요 팬층인 10~20대가 아니라면, 베트남에서 한류가 한국 제품 구매로 이어지는 영향력은 더 낮을 수 있다. 하노이의 택시기사 응우옌 쑤원 허우(43)는 기아 K3 승용차를 운전한다. 그는 한국차를 택한 이유를 “동급 일본차보다 싸고 옵션도 많아서”라고 했다. 하노이 도로에서 중형차는 일본차가, 소형차는 모닝·i10 등 한국차가 대세다. 한국 드라마 <첫사랑>이 인상적이었다고 한 허우는 “한국 드라마가 한국차 구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싸고 내구성이 좋아서 고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계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응우옌 비엣 탕(39)은 혼다 시빅을 타고, 삼성 스마트폰을 쓰며, 부영 비나에서 지은 아파트에 산다. 그는 “한국 제품이어서 사는 게 아니다. 품질과 가격을 비교해보고 고른 게 한국 제품이었다”고 했다.
김근향 코트라 호치민무역관 부장은 “베트남에서 한국 제품은 ‘고급’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 제품이라는 이유로 불티나게 팔리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호치민 라이프플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