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여권이나 체류증 교부를 둘러싼 고액의 금전 거래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지난 10월 10일 유럽행 ‘황금 비자의 비리’ 보고서가 국가부패지수 측정전문기관 트랜스퍼런시 인터내셔널(TI)과 글로벌 위트니스(GW)를 통해 공동으로 발표되면서 뜨거운 감자로 대두됐다.
두 국제민간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최근 10년 간 EU여권 6천 건, 체류증 10만 건 이상이 뒷거래 되었고, 액수는 250억 유로에 이른다.
비유럽권 부호들이 럭셔리 명품브랜드를 구매하는 것처럼, 유럽행 ‘황금 비자’를 소유하기 위해 초호화판 요트에서 제로(0)가 7개까지 기입된 수표에 망설임 없이 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 EU 여권은 ‘열려라 참깨!’
‘열려라 참깨!’로 간주되는 EU여권을 브랜드 상품으로 내걸고 있는 국가들로는, 키프로스, 몰트,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 4개국이 도마에 올랐다. 몰트 여권은 1백만, 사이프러스 여권 2백만, 오스트리아 여권은 1천만 유로에 거래되고 있다고 국제 민간기구가 밝혔다.
이외에 유럽시민들과 동등한 삶을 누릴 권한이 주어지는 체류증을 브랜드 상품으로 내놓는 국가들은 스페인, 헝가리, 포르투갈, 라트비아, 영국 등이 각각 10,000건 이상 ‘황금 비자’를 배부했다. 이밖에도 키프로스, 몰트, 불가리아를 포함하여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이어서 프랑스도 리스트에 올랐다.
가령 그리스나 라트비아에 25만 유로를 투자하면 까다로운 제약 없이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다른 EU회원국들에 비하여 가장 낮은 금액이다. 포르투갈은 50만 유로를 부동산에 투자하면 체류증이 교부되고, 5년 후에 여권을 취득할 수 있다. 키프로스나 몰트가 몇 배 더 비싼 이유는 단시일에 여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 돈세탁과 탈세 부추기는 범죄형 비즈니스
‘황금 비자’는 1980년대 카리브 제도에 떠있는 세인트키츠 네비스 섬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국가금고에 돈을 채우고자 외국인들의 투자를 유혹했던 뒷거래였다. 재정난을 겪는 유럽 국가들도 타개책으로, 적격 인물인지, 투자 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 검증 없이 ‘황금 비자’를 교부한다는 의혹을 받는다. 서류를 결재하는 국가 고위직들을 둘러싸고 뇌물도 만연하여, 포르투갈에서는 내무부장관이 뇌물혐의로 사퇴하는 스캔들마저 야기됐다.
무엇보다도 ‘황금 비자’가 돈세탁과 탈세의 통로가 된다는 점이 우려를 낳는다. 범죄자들에게 은신처와 활동무대를 마련해주는 관문이라고 EU의회에서도 경고했다. 최근에는 러시아인 사업가가 1천만 유로 돈세탁에 연루되어 적발됐는데, 그는 몰트 국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황금 비자’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중개업 비즈니스도 성황을 이룬다. 거래 금액의 10%를 커미션으로 챙기는 비즈니스로, 중개업자 대부분은 신분노출을 극히 꺼려한다.
‘황금 비자’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한 프랑스인 중개업자는 1년에 약 50건을 떠맡는다고 밝혔다. 의뢰자들이 선호하는 행선지는 탈세천국 키프로스 섬. 니스 출신의 한 프랑스인도 탈세와 돈세탁을 목적으로 키프로스에 부동산을 구입한 후 이중국적을 취득했다. 이 과정에서 중개업자는 4만 유로를 커미션으로 챙겼다.
EU의원들 중에는 유럽의 치안과 안보차원에서 ‘황금 비자’를 전면적으로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국가마다 국적이나 체류증 교부는 엄연한 주권행사이다. 그럼에도 부도덕한 뒷거래 비즈니스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듯 도덕성 차원에서 EU 회원국들은 ‘황금 비자’ 거래를 꼭꼭 숨겨왔었다. EU위원회, OECD 등 국제기구를 비롯하여 국제민간기구들의 압력이 거세짐에 따라, 몰트나 사이프러스도 2012년 이후의 거래내역을 밝히기 시작했다. 여권장사로 호황을 누린다는 평판을 지닌 키프로스는 2013년 이래 48억 유로, 몰트 45억 유로, 포르투갈은 35억 유로를 벌어들인 것으로 집계된다.
두 국제민간기구의 올 4월 중간보고에 의하면, 포르투갈은 2012년 이래 5,717건의 ‘황금 비자’를 교부했다고 시인했다. 이중 3,645건은 중국인, 493건 브라질인, 228건 아프리카인, 200건 러시아인, 131건은 터키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지난 10월 10일 보고에 의하면, 포르투갈이 2012년 이래 판매한 체류증은 1만7천 건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인터폴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인들, 도피 중인 브라질인 범법자들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 주요 고객은 중국인과 러시아 부호들
‘황금 비자’ 스캔들의 중심에는 누구보다도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 중개업자는 거래인의 50%가량이 중국인들이며, 나머지는 중동인과 러시아인들이 주로 차지한다고 밝혔다.
중국은 갈수록 신흥 거부들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여기에 비례하여 중국정부의 통제를 피하여 해외로 빠져나가려는 사업가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서 ‘황금 비자’ 중개업 비즈니스가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중국적을 취득하려는 러시아인들 대부분도 푸틴의 눈 밖에 난 부호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는 자국민 부호들이 이중국적자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황금 비자’ 비리를 집중 취재하는 프랑스 기자 베아트리스 마티유가 설명했다.
▶ 부정 비리 취재하던 기자, 테러로 목숨 잃기도
음과 양의 이치처럼, ‘황금 비자’의 비리를 쫒는 사냥꾼들도 맹활약을 벌이고 있다. 복수국적의 탈세와 돈세탁을 색출하고자, EU회원국들과 은행구좌정보를 공유하는 핫라인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때로는 007 제임스본드를 방불케 하는 스파이 작전도 동원된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 몰타 정부의 부정부패를 취재하던 몰타 저널리스트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지아는 2017년 10월 자동차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몰타가 ‘황금 비자’의 원초였던 세인트키츠 네비스를 그대로 모방하여 여권판매 사업을 벌인다고 여기자가 고발했던 터였다. 이후 기자의 이름을 딴 ‘다프네 작전’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몰타의 여권판매를 둘러싼 비리를 파헤친 결과, 2018년 2월에는 몰트의 필라튀스 은행장이 체포됐다.
올해 3월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이란으로 11,500만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이란 사업가가 미국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문제의 이란 사업가는 스위스와 터키를 통해 거액을 송금했는데, ‘황금 비자’ 중개업으로 유명한 헨리앤 파트너스 컨설팅을 통해 세인트키츠 네비스 여권을 구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2017년 브렉시트 이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려는 영국인들도 부쩍 증가했다는 소식이다. 2015년에 비하여 8배가 늘어난 수치이다. 2015년 프랑스 국적 신청자는 386명이었지만, 2017년 브렉시트 발표 이후 3,173명으로 증가했다. 2018년 상반기에만 영국인 신청자는 1,370명에 이른다고 프랑스 내무부가 밝혔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 이병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