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인 힘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부정적인 이슈들 중 하나로 여성 혐오가 떠오르고 있다. 지난 해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 혐오 논란이 더욱 시끄러웠으나 대상이 남성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굳이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범죄에 노출된 대상은 대체로 힘이 약한 여성들이라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끔찍한 범죄들 앞에 놓여 온 여성들이 이제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도 모자라 여성 혐오 논란에까지 휩싸여 이중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논란 이 여성들의 능력과 권리의 부상이라는 과도기로서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요즘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고백하는 ‘Me Too 운동’과 같은 통로를 여성들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제 드디어 사회에 여성의 힘이 당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들의 권리가 존중되고 평등해지는 이면에 그보다 더 약한, 보호받아야 마땅한 아동,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 또 다른 약자들이 어두운 곳에서 범죄 앞에 놓일 수 있다는 점과 가끔은 무고한 신고로 억울한 누명을 쓰는 남자도 발생한다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성성, 즉 여성적인 힘을 꼽는다. 물론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성 자체가 아니라 여성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자체를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극단적인 경우 또 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으며 오히려 여성성을 방해하는, 평등하고 누구나 누려야 할 행복이나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여성적인 장점을 통해 더 진화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인도네시아 옛이야기 ‘하이누웰레(Hainuwele) 소녀’는 우주와 자연의 대표로서 여성적 특징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하이누웰레는 모성적 포용력과 나눔, 베풂과 치유적인 힘, 강인함과 자생력, 화수분과도 같은 생산력과 순환, 미래 등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처음 ‘하이누웰레 소녀’를 접했을 때 좀 충격적이고 무서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끌림과 매력이 있었고 한동안 이 독특한 소녀를 머릿속에서 내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극이나 흥미와는 다른, 색다른 감정 또는 인식과 같은 것이었는데 내 마음 속에서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깊이와 상징, 관념 같은 것들을 알아차리고 싶은 내밀한 욕구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욕구는 아직도 다 충족되지 못한 채 불현듯 마음을 답답하게 하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래 전 충격을 받았던 또 다른 옛이야기 ‘옥수수 어머니’가 생각나는 이야기였고, 이 미국의 인디언 옛이야기와 인도네시아 옛이야기가 모두 무겁고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여성의 희생’이라는 공통적 제재를 가지고 전해진다는 점에서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출발한 두 이야기는 여전히 나에게 여러 가지 풀지 못한 숙제들을 남기고는 있으나, 무척 존경스러운 이야기들로 맘속에 자리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이누웰레 소녀’는 인도네시아의 세람(Ceram) 섬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코코야자나무의 꽃즙에 떨어진 남자의 핏방울에서 탄생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하이누웰레’ 라는 이름은 ‘야자나무 가지’라는 뜻이고, ‘누웰레(nu wele)’는 야자나무, ‘하이(hai)’의 ‘ha’는 가지,‘i’는 3인칭 소유격 접미사이다.
송영림 소설가, 희곡작가, 아동문학가 ■ 자료제공: 인간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