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꿈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재천 영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친한 친구들은 이 결정을 의아하게 여겼다. 아직까지 베트남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은 주로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충고하곤 했다. “그 곳은 너를 필요로 하는 곳이다. 나는 너와 그 곳을 위해 항상 기도할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김재천 영사는 당시 한국 청년들의 꿈의 직장이었던 삼성에 입사하였다. 그러나 입사 1년 후 베트남으로 가겠다는 원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퇴사를 결정했다.
김재천 영사가 처음 베트남에 온 것은 1992년 5월, 고밥(Go Vap)에 위치한 한국의 한 작은 회사 업무를 위해서였다. 당시 베트남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못했다. 호치민시에 위치한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사무실에 앉아, 김재천 영사는 당시 호치민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김재천 영사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호치민시는 어느 집이던 비밀스럽게 철문이 달려 있었고, 지금과 같은 유리창은 볼 수 없었다. 벽을 페인트칠하기 위해 빗자루를 사용하고, 지금과 같이 NIPPON페인트와 롤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에도 지금처럼 큰 홍수는 있었어요. 우기에는 바탕하이(Ba Thang Hai)거리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였죠.”
하지만 낙후한 베트남의 현실도 김재천 영사의 베트남에 대한 꿈을 버리게 하지는 못했다. 1992년 2월, 베트남과 한국은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김재천 영사는 외교부 시험을 봤다. 당시에 외교부에는 그의 베트남어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김재천 영사는 말했다. “그들은 저를 가르쳤던 교수님께 테스트를 부탁할 수 없었어요. 객관성을 위해, 그들은 당시 최초의 베트남 대사였던 응웬 푸 빈(Nguyen Phu Binh)대사의 부인에게 테스트를 부탁했죠.”
1995년, 김재천 영사는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교육,체육,문화 담당 영사로 베트남 땅을 다시 밟았다. 그때의 베트남은 이전과는 또 달랐다. 김재천 영사는 말했다. “길에는 더 많은 오토바이들이 있었어요. 택시도 등장했는데, 최초의 택시는 비나선 택시였어요. 한국 회사들의 베트남 투자로 인해 많은 변화가 나타났죠.”
자식들에게도 베트남 사랑을 가르치다
김재천 영사는 매일 오전6시에 일어난다. 두 아들과 아침식사 후 학교에 보낸다. 그 후에야 김재천 영사는 1군에 위치한 영사관으로 향한다.
베트남에 있는 100.000명이 넘는 한국 교민들은 늘 여러가지 문제를 겪는다. 이 외에도 한국에서 살고 있는 100.000명이 넘는 노동자들과 60.000명의 베트남 신부들의 문제도 있다. 김재천 영사는 한베 외교관계 수립 25주년 기념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람은 베트남 사람과 같이 감정이 풍부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의 역할은 과거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협력 관계를 시작하고 있다.
김재천 영사는 가능하다면 은퇴할때까지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후에, 그는 노년을 베트남에서 즐길 것이다. 만약 외교부에서 계속 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호치민시 사범대학교 혹은 껀터대학교 한국학 센터에서 일할 것이다.
2012년 양국의 외교 관계 수립 20년을 기념하여 김재천 영사는 호치민시 인민위원회에서 감사장을 받은바 있다. 2017년 8월 초에는 베트남 우호연맹에서 그에게 기념증을 수여할 계획이다. 그러나 김재천 영사는 그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아무런 유산을 남겨주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베트남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나 또한 두 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요. 아들들에게 앞으로 어디를 가던, 어느 나라에서 살던 매년 제 고향과도 같은 베트남으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당부했어요.”
[호치민 라이프플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