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로창현 칼럼니스트
계절의 보폭이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무르익은 만추(晩秋)는 어느새 새벽 한기에 흠칫 몸을 떨 만큼 곧 다가올 겨울에 자리를 내줘야 할 듯 합니다. 강작가님이 있는 중국 단둥(丹東)은 초겨울 서리가 시작되었겠지요.
어제 아침 ‘통일떠돌이 16일차’라며 보내주신 소식 읽으며 가슴 한켠이 아려 왔습니다. 지난해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땅끝마을을 떠나 꼬박 만 400일간 1만4500km를 달려 10월 6일 단둥에 도착한 당신이 북녘 산하를 코앞에 두고 이렇게 기약없이 기다리게 되다니 말입니다.
말이 쉽지, 유라시아 대륙 16개국을 오로지 두발에 의지한 채 달려온 인류사 초유의 대장정(大長征)이 어디 보통 일이겠습니까. 매일 40여 km씩 대륙에서 대륙으로 옮겨온 그 걸음수만 3천만보는 족히 되었으니 한땀한땀 정성껏 통일의 비단자수를 놓은 듯 고개가 수구려지는 날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신과의 인연은 권력과 금력에서 자유로운 세상의 유의미한 미디어가 되겠다는 일념에서 탄생한 ‘뉴스로(www.newsroh.com)’와 함께 이어져 왔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8일 ‘일본전범기퇴출 평화마라톤’을 뉴스로가 주최할 때 당신은 뉴욕의 마라톤 대부 권이주 회장, 김성유님과 함께 뉴욕 롱아일랜드의 위안부기림비에서 뉴저지 팰리세이즈팍의 위안부기림비까지 60km(37마일)를 완주했지요.
영하의 추위를 뚫고 어둠에 싸인 새벽녘 뉴욕 롱아일랜드를 출발해 맨해튼을 지나 오후 늦게 뉴저지 팰리세이즈팍에 도착했을 때 백영현 일전퇴모(일본전범기퇴치시민모임) 공동대표는 “이렇게 추운 날 전범기 퇴출을 외치며 백오십리 길을 쉬지 않고 달린 마라토너들을 보니까 눈물이 절로 난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그날 소감을 묻자 당신은 “요즘 훈련이 부족해 레이스 막판 근육경련이 오는 등 조금 힘들었지만 50마일(80km) 레이스도 뛴 경험이 있어서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힘든만큼 보람이 큽니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지요. 지난 13개월간 매일 40여 km를 거뜬히 달린 지금의 ‘수퍼 울트라 철각(?)’ 마라토너로선 상상하기 힘든,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이었다고 할까요. ^^
당신은 이듬해 11월 30일에도 뉴스로가 후원한 ‘남북평화통일기원 마라톤’에 참여했습니다. 뉴저지 포트리의 한국전참전용사비 앞에서 맨해튼 배터리파크를 왕복하는 27마일(약 43.5km) 을 권이주회장과 홍순완 시카고한인마라톤클럽 고문과 펜실베니아의 백성원 아카디아대학 한국학연구소장 등 4인의 노장 철각이 거뜬히 완주했습니다. 공교롭게 당신은 뉴욕, 권이주회장은 뉴저지여서 4개주를 대표하는 한인마라토너 4인이 모인 셈이었습니다.
이제야 말이지만 그때부터 당신을 남다르게 봤습니다. 대회를 마치고 권이주회장이 레터 사이즈의 취지문을 건네면서 “강명구씨가 쓴건데 글을 아주 잘 씁니다” 하시더군요. 이런 내용이 있었지요.
“내년(2015)이면 분단 70년입니다. 통일이라는 화두를 남북한 모든 시민들의 마음과 일상으로 끌어내기위해 미주 동포들이 먼저 꺼져가는 통일의 불씨를 살려내자는 염원으로 달렸습니다..작은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듯 달리면서 뜨거운 가슴으로 통일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겠습니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주도권은 동맹국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잡아나가야 합니다. 오늘의 달리기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선조들의 벅찬 희망을 안고 미주를 이어달리자는 뜻에서 ‘남북평화통일 기원 횃불 전미주이어달리기’라는 타이틀로 계속 달릴 것입니다..”
매끄러운 문맥도 그렇거니와 ‘한반도 평화통일의 주도권은 동맹국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잡아나가야 한다’ ‘오늘의 달리기는 시작에 불과하다..선조들의 희망을 안고 계속 달리겠다’ 는 내용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남과 북의 정상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동북아의 격변을 주도하는 모습과 이후 당신의 행보를 예견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2015년 1월, 놀랄만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단독으로 LA에서 뉴욕까지 마라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위험했습니다. 그간 미대륙횡단 마라톤에 성공한 이들은 수십명에 이르지만 단독으로 한 사례는 거의 찾기 어려웠습니다.
2010년 한국인 최초로 미대륙횡단마라톤에 성공한 권이주 회장(당시 만 65세)의 경우, 차량 두 대가 앞 뒤에 서고 4명의 인력이 레이스 내내 지원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들개를 비롯한 야생동물의 공격과 교통사고의 위기 등으로 아찔한 순간을 여러 차례 겪어야 했습니다.
권이주 회장은 당시 이미 풀마라톤 130회가 넘는 기록을 갖고 있었고 출발전에 대규모 한인후원회가 결성되는 등 매스컴의 관심도 높았지만 당신은 경험도 부족한 무명의 마라톤동호인이었고 도움을 주는 이들도, 관심을 갖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저는 가까운 분들에게 당신의 무모한 도전을 말려달라고 진심으로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의지는 결연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전부터 꿈꾸던 단독마라톤을 위한 특별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지요. 마라톤을 즐기는 미국의 엄마들이 애용히는 조깅용 유모차를 밀며 뛰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유모차에 아기대신 캠핑용 기구와 옷가지 등 50kg 이상의 생존장비들을 싣고 달리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NEWSROH는 ‘강명구씨 나홀로 미대륙횡단 마라톤에 나서다’라고 보도하였고 장도에 앞서 강작가님의 출사표도 받았습니다. 달리는 틈틈이 글도 보내오겠다고 했습니다.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선 당신의 필력을 궁금해하는 저에게 “20대때부터 문학을 하고 싶어했지만 문단에 데뷔하거나 책을 쓰거나 한적은 없어요. 그냥 글쓰는걸 좋아합니다”라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앞으로 ‘마라톤 문학’의 장르를 개척하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구요.
그것이 뉴스로에 ‘강명구의 마라톤문학’이라는 칼럼이 만들어지고 당신을 ‘마라토너 작가’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지요.
그해 2월 5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남북평화통일’이라는 한글과 영문 배너를 단 유모차를 밀면서 시작된 당신의 레이스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고군분투(孤軍奮鬪)였습니다. 길잡이와 보호장치도 없이 차들이 쌩쌩 오가는 도로를 달려야 했고 GPS시계와 구글맵도 작동하지 않는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길을 잃기가 일쑤였습니다.
때로는 몇십 km를 다시 돌아갔고 생필품을 사기 위해 100파운드가 넘는 유모차를 밀면서 마트가 있는 도시로 들어가는 가외수고는 일상이어서 나홀로 대륙횡단은 매일매일이 크나큰 도전이었습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데쓰밸리 인근에서 길을 잃는 위기일발이 있었고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서 여우와 함께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습니다. 록키산맥에선 눈폭풍에 갇히더니 대평원에선 토네이도에 전전긍긍(戰戰兢兢)했습니다. 정강이 근육부상으로 며칠째 꼼짝못해 레이스 포기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지요.
총 14개주, 5200km를 달리는 동안 중도 포기의 위기 상황이 여러차례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신묘하게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하셨지요. “마치 대자연의 정령(精靈)이 저를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구요.
왜소한 중년의 아시안 남성이 큼지막한 유모자를 밀며 달리는 모습을 보고 방을 내주고 따뜻한 식사를 건넨 아메리카 원주민 가족, 테네시의 작은 마을에서 유모차에 건 태극기를 보고 달려와 “아저씨 한국사람이에요?”하며 반가워하던 한국인 여학생, 중국뷔페에서 ‘LA-NY’이라고 쓴 유모차를 보고 ‘엄지 척’하며 식사비를 내준 주민들. 달리는 도중 만난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살뜰한 격려는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힘을 북돋은 원천이 되었습니다.
뉴욕 유엔본부 앞에 125일만에 골인한 6월 5일은 공교롭게 뉴스로 창간 5주년 기념일이기도 했습니다. 떠날때는 외로웠지만 레이스에 대한 한인사회의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도착 무렵에는 수십명의 마라톤 동호인들이 동반주를 하는 등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지요.
보기좋게 구리빛 피부로 탄 당신은 “나같은 50대 중년의 평범한 사람도 대륙횡단 마라톤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한 할머니가 눈에 띄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박보배 여사였습니다. 넉달넘게 가슴 졸였던 어머니는 환영객과 기자들에 치여 아들에게 감히 다가갈 생각도 못한 채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전화로 목소리만 듣다가 이렇게 만나니 너무나 좋아요."
당신이 활짝 웃으며 어머니에게 다가와 포옹을 하는 장면을 보노라니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그날 현장 인터뷰에서 저는 무심결에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강명구씨. 혹시 다음에 도전하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당신은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주책없는 기자는 “막연히라도 도전해보고 싶은게 있지 않을까요?”라고 한번 더 질문했습니다. 눈을 잠시 껌뻑이더니 “기회가 된다면 미대륙보다 큰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싶다”고 했지요.
솔직히 상상을 뛰어넘는 답변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미대륙을 혼자 완주한 것도 기막힌 일인데 테러의 위협을 일상으로 겪는 지역을 통과해 꽁꽁 얼어붙은 한반도까지 종단하는 4만리 길을 달리고 싶다니요.
뻔한 질문에 터무니없는 답변이었을 그날의 해프닝이 불과 15개월만에 현실로 옮겨질 줄은 저를 비롯한 현장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당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中편 계속>
글로벌웨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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