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투병..병상인터뷰
‘장기수 송환 왜 안되나’
Newsroh=로창현기자 newsroh@gmail.com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석달 후 1차 송환된 61명의 비전향장기수들 가운데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때만 해도 곧 2차송환이 있을줄 알았다. 감옥에서 꼬박 35년을 살고 1993년 병보석으로 출감하고도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박종린(86). ‘신념의 강자’로 불리는 비전향 장기수치고 형극(荊棘)의 세월을 살지 않은 이는 없지만 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다. 1933년 중국 길림성 훈춘현 반석촌에서 항일투사인 부친(박승진 1945년 작고)과 모친(채성녀 1988년 작고) 사이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국광복회 활동을 하던 부친은 일제에 체포돼 7년간 형을 살다가 해방을 맞지만 들것에 실려나올만큼 위중했다. 마지막을 고향에서 보내기 위해 가족과 함께 두만강 맞은편에 있는 함북 경원군(현 샛별군) 안농면으로 돌아왔다.
석달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1948년 만경대혁명가유자녀학원에 입학, 혁명2세대로 성장했다. 인민군 복무후 1959년 5월 대남사업에 소환돼 연락원 대신 대리 남파됐다가 5개월만에 체포됐다. 이른바 ‘모란봉 간첩단’ 사건이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그 와중에 4.19가 터지자 관련자들은 모두 무혐의 석방됐지만 북에서 온 그이만 무기징역을 받았다. 변호인단과의 합의에 따라 장면 정부가 북송 준비를 하는 사이에 5.16이 터졌다. 반공정책의 강화속에 관련자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도망가고 홀로 남은 선생만 내리 35년 징역을 살게 된 것이다.
복역중 라디오를 몰래 들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돼 또다시 무기형을 선고받아 그는 보기드문 ‘쌍 무기수’가 되었다.
광주와 전주, 대전, 대구교도소를 전전한 그는 1993년 몸무게가 40kg 이하로 빠지며 사경을 헤맸다. 당시 무안 용학교회(임영찬 목사)가 무연고 장기수와의 자매결연을 맺고 신변각서를 대신 써 줘 199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병보석(病保釋)으로 출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의 신변각서는 훗날 1차 송환때 당국이 그를 전향장기수로 판단하는 오류의 원인이 되었다. 어설픈 행정이 빚은 또한번의 비극이었다. 통일부에선 “곧 2차 송환이 있을테니 그때 넣도록 하겠다”고 미안해 했지만 말뿐이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통일운동을 하는 시민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는 ‘민족 21‘ 사업과 범민련 경인연합 고문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을 쉬지 않았다. 출옥후 중국 훈춘(琿春)에 있는 조카들을 수소문해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체포될 때 고향엔 결혼한지 14개월밖에 안된 아내(로인숙)와 생후 100일 된 딸(박옥희), 그리고 노모가 있었다.
아내는 시어머니가 1988년 돌아가실때까지 극진히 모셨고 유일한 혈육인 딸을 김일성 대학 교수로 키워냈다. 그러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1997년 조카를 통해 남편의 기막힌 소식을 전해듣고 그만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떴다는걸 3년 뒤에나 알았어요. 딸아이가 혹시라도 아버지까지 충격을 받고 잘못될 수 있다며 중국 조카들에게 당분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다는 겁니다..”
그는 2007년 노무현정부때 평양서 열린 6.15공동선언 7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남측 대표단 3백여 명의 일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사흘 일정의 마지막 날, 행사장 유리창 너머에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덧 오십을 내다보는 딸 옥희였다.
중국조카로부터 전달받은 딸과 손주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멀리서 누가 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딸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그저 옆사람을 보는가 했지요. 나중에 떠나는데 안내원이 딸이 왔다는 얘기를 귀띔해 주더라구요. 떠나는 버스에서 멀리 딸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2007년 행사를 계기로 선생과 양부(養父)와 양아들의 인연을 맺은 김재유 전 6.15남측위 공동위원장은 “그때 딸 얼굴을 한번 제대로 못보았다며 펑펑 우시더라구요. 평양까지 가서 48년만의 상봉도 못했으니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라고 회상했다.
2007년 방북했을때 금강산 화암사에서 박종린선생과 김재유 6.15남측위 공동대표
하지만 박종린 선생은 잃어버린 청춘을 한 번도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북의 가족들 생사를 확인한 것만도 행복하고 동지들에 미안하다’며 ‘다시 태어나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 딸과 손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재인정부 출범후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이 이뤄지면서 그는 죽기전에 고향땅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고 있다.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없던 힘이 솟아나고 있어요. 그전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젠 조금 더 살면 좋겠습니다.”며 생의 의욕을 보인다.
고향에 가면 가장 먹고 싶은게 무엇인지 묻자 선생은 “평양 냉면 생각이 나네요. 젊을 때 먹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권때 체포돼 김영삼 정권까지 수형자(受刑者)로 살다가 19대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도록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박종린 선생. 그의 삶 자체가 우리 민족의 아픈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2000년이후 2차 송환을 기다리던 3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이제 18명만 남았다. 90세 전후의 고령(高齡)으로 대부분 건강이 극히 안좋은 상황이다.
10년, 20년도 아니고, 무려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더 늦기전에 오직 인도주의(人道主義)로 이들을 가족 품에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인가. 구순을 바라보는 선생이 육순의 딸과 30대 손주들 손을 잡고 옥류관 냉면을 먹으러 가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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