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로창현 칼럼니스트
“아주 막연한 꿈이지만 언젠가는 파리부터 부산까지 유라시아 철도길을 따라 나홀로마라톤을 하고 싶습니다. 중국과 압록강을 거쳐 우리의 북녘 산하를 지나서 부산에 가는 소망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당신은 역사적인 나홀로 미대륙횡단마라톤에 성공한 2015년 6월 5일 유엔본부 앞에서 더욱 역사적인 선언을 한 셈이었습니다.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은 채 오로지 두발로 달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횡단한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뛰는 이유가 보통사람의 작은 몸짓 하나일지언정 얼어붙은 남북 화합과 통일의 밀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었으니 미디어가 좋아할만한 제목이었습니다.
그해 늦여름 당신은 26년 미국의 삶을 정리하고 모국으로 홀연히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이 나홀로 모국일주 마라톤이었습니다. 미대륙을 횡단할 때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유모차엔 ‘남북평화통일 전국일주마라톤 1879km’라는 배너가 달렸더군요.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임진각으로 올라가 휴전선 따라 포천 화천 양구를 거쳐 동해안과 남해안, 그리고 서해안으로 돌아오는 코스는 사반세기를 떠나있던 모국의 산하와 만나는 가슴 저린 여정이었습니다. 게다가 독도와 제주도까지 거쳤으니 온전한 모국일주요, 국토순례 마라톤이었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이 처연한 팽목항에서는 희생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고 추모시 ‘하얀 목련’을 적은 노란 종이배를 띄워 보내는 작은 진혼제(鎭魂祭)를 올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모국에서 달리기를 하며 수많은 이들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중엔 ‘달리는 수행자’ ‘탁발 마라토너’로 잘 알려진 진오스님이 있었지요. 스님은 군복무시절 사고로 한눈을 실명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도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승복을 입고 염주를 두른 채 달리는 탁발 마라톤을 통해 이주여성을 돕는 모자원을 운영하고 베트남 학교 해우소(解憂所) 짓기 사업, 북한이주민 지원단체 등 수많은 자선사업을 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해 스님과 함께 베트남 종주 2200km 마라톤, 네팔지진피해돕기를 위해 수도 카트만두에서 부처님탄생지 룸비니까지 달리는 모금마라톤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뿐만인가요. 이땅에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전쟁위기가 고조됐을땐 사드배치철회와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평화마라톤을 제주 강정마을에서 출발해 성주 소성리, 부산 울산 대구 전주 대전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서울 광화문광장까지 달렸습니다. 바야흐로 당신은 ‘평화마라토너’ ‘통일마라토너’라는 수식어가 하등 이상할게 없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라시아 대륙횡단 마라톤의 꿈을 조금씩 펴나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대륙횡단과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걸림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산부터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당신의 뜻에 호응하는 뜻있는 서포터들이 모였고 후원할만한 기업도 타진했습니다.
더러 관심을 갖는 기업도 있었지만 유라시아횡단 대장정의 취지가 ‘평화통일’이라는 말에 꼬리를 빼곤 했습니다. 차라리 ‘분단고착’으로 슬로건을 내걸었다면 기업들이 달려들었을까요? 하긴 통일운동을 혐오하는 ‘이명박근혜’ 외눈박이 10년 세월에 ‘종북 매카시즘’은 우리 사회안에 악성종양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입니까. 모두가 고개 젓는 미대륙횡단 마라톤을 홀홀단신으로 성공시킨 천하의 강명구 아닌가요. 100여년전 이상열 이준 이위종 열사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조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헤이그까지 왔겠습니까. 당신 역시 유라시아 대륙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깡’으로 날아왔겠지요. 당신이 믿는 유일한 ‘빽’이 있었다면 “달리면 모아지는 힘이 있다”는 마라토너들의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대장정 출발에 앞서 당신은 ‘한 기자의 질문으로 시작된 유라시아 대륙횡단’이라는 글 한편을 보내왔습니다.
“간혹 인류의 역사나 개인의 삶은 사소한 곳에서 시작하여 급물살을 타고 물줄기가 확 바뀌기도 합니다. 2015년도의 내가 그랬지요. 이민생활 26년에 지칠 대로 지친 난 느닷없이 짐을 꾸려 美대륙횡단마라톤에 나섰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이때까지 저의 미대륙횡단마라톤은 단지 평범한 사람의 일탈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일탈(逸脫)을 한 기자의 기사가 화려하게 변신을 시켜주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강명구씨 아시안 최초로 나홀로 미대륙횡단마라톤에 나서다” 였습니다. 아시안 최초라는 수식어(修飾語)가 내게 붙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결심을 하고 꼭 완주를 하리라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뉴욕의 함마슐트 광장에 들어왔을 때 어느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내게 다음 도전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얼떨결에 여행 가방을 싸서 출발해서 기왕에 출발한 것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 말고는 나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막연히’라도 생각하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아서 “그저 막연히 미대륙보다 큰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기사에서 “강명구씨 다음 도전은 유라시아 대륙!”이라고 썼습니다. 그야말로 기자에게 낚인 대답이 기사가 되고, 그것이 정말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이 유라시아대륙횡단 평화마라톤의 기획자이고 연출자입니다. 그는 내 인생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마법의 지휘자(指揮者)였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끝에 의해서 연주하는 연주자(演奏者)가 되었지요...”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당신의 마라톤을 멀리서 지켜보며 기사를 쓰고 사진이나 올리던 제가 어찌 감히 역사적인 미대륙횡단마라톤과 유라시아마라톤의 기획자요, 연출자이겠습니까. 당신의 무수한 달리기에 땀한방울 보태준 일 없는 처지에 인생을 바꿔놓은 마법의 지휘자요, 연주자라니요. 당치도 않은 헌사(獻辭)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당신의 대장정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계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인연법(因緣法)’에 의한 것이며,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정성을 보태고 성원을 보낸 모든 이들의 힘으로 이뤄진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과 모국의 산하를 달리는 사이 우리 조국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촛불시민혁명으로 정권을 바꾸고 비정상화의 정상화를 위한 힘찬 발걸음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이준열사가 이루지 못한 110년 묵은 ‘자주독립’의 꿈을 가슴에 안고 유럽의 땅끝마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날아가 이제야말로 세상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유라시아대륙 1만 6천km를 달려서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오는 대장정을 시작하려합니다. 지난겨울 우리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장면들을 세계시민들하고 이야기하고, 전쟁 없는 세상의 꿈을 나누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세계평화를 얼마나 앞당기게 될 지를 토론하고 오겠습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가슴 속에 있는 통일에 대한 염원의 불씨와 세계 시민의 평화에 대한 갈망(渴望)을 유라시아 대륙, 실크로드를 달리면서 모두 다 담아와 평화통일의 불길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서로 소통하는 통로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평화통일기원 ‘유라시아대륙횡단 평화마라톤’을 통하여 찾으려합니다. 유라시아대륙을 달리며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간절한 염원을 알리고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웅변(雄辯)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고통스런 달리는 행위를 통하여 주장할 것입니다.”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네덜란드 헤이그에 날아온 당신은 이준열사 기념관 앞에서 경찰들의 환송(?)을 받는 해프닝속에 유모차를 밀며 지난한 여정에 나섰습니다.
강작가님. 안위를 담보할 수 없는 열여섯 나라들을 통과한 순례기는 석달 열흘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로렐라이의 언덕에서 하멜른의 홀로 뛰는 사나이를 연주했고 왈츠 리듬에 맞춰 알프스산도 내려왔습니다. 그리스신화가 살아 숨쉬는 코카서스 산맥을 통과했고 불타는 화염산을 지났으며 눈덮인 천산산맥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제르바이잔에선 김구선생의 꿈을 만났고,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과 신라 공주 파라랑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쿠쉬나메 서사집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지요.
당신은 그렇게 어디를 가나 놀랄만한 인문학과 역사학의 소양(素養)을 바탕으로, 때로는 로맨틱한 연시로, 때로는 유장한 서사시로 설화와 전설을 노래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유럽에서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중세영국 이야기문학의 걸작 ‘캔터베리이야기’를, 중앙아시아에서는 세헤라자드의 ‘아라비안나이트’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중원 대륙을 달릴 땐 ‘삼국지(三國志)’와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버무려져 얼마나 흥미로왔던지요.
어쩌면 대장정을 마칠 무렵엔 강명구의 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가 마라톤문학의 효시(嚆矢)이자 정수(精髓)로 평가되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기대도 해봅니다. 두 발의 힘으로 4만리를 달리며 갈라진 민족이 하나 되는 평화의 길을 찾는 21세기의 통일순례기가 다름아닌 주인공의 또렷한 활자로 새겨지니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한혈마(汗血馬)와 함께 풀마라톤 거리를 달리며 언어의 연금술사(鍊金術師)가 뿌리는 매혹적인 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역사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실 당신의 유려한 글들은 행간 곳곳에 절절하게 배어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헤어진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 동강난 조국강토의 뼈저린 아픔 말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민족의 비애요, 당신의 애끓는 가족사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유라시아 대장정의 길은 평생 고향인 대동강의 소나무숲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화해라고 했습니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서는 도저히 가지 못한 머나먼 길을 가기 위하여 세상사람 아무도 달려보지 않은 16,000km를 달려서 간다. 그곳은 아버지의 영혼이 늘 머무르던 곳이고 내 오이디푸스적 콤플렉스의 원향(原鄕)이다. 아버지의 핏줄에 흐르다가 내 핏줄 속에서 거칠게 일렁이는 대동강에 발을 담그고 아버지 살아서는 이루지 못한 아버지와의 화해를 하고 내려올 것이다. 그곳에서 영혼으로 머무를 아버지를 만나 “사랑합니다. 아버지!” 소리 높여 외치고 눈물 한 무더기 대동 강물에 섞고 오겠다.”
그렇게 시인 아버지의 이야기도 했고, 광목치마의 추억이 담긴 어머니의 이야기도 했습니다. 가슴속에 꽁꽁 감춰둔 첫사랑의 이야기도 수십년만에 털어놓았습니다. 유라시아 대장정은 강명구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였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단둥 도착 직후 인터뷰한 KBS 특파원이 “북에서 할아버지 성묘를 하고 싶다”는 중의적(重義的) 답변을 이해못하고 “성묘하기 위해 1만4천km를 달려왔다”는 단순보도로 성원하는 많은 이들을 당혹케 하는 일도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이에겐 성묫길이요, 또 어떤 이에겐 구도의 길이요, 평화의 길이요, 통일의 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下편 계속>
글로벌웨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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