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나와 변철호선생은 종종 전화련락을 하고있다. 8월 31일 오전, 내가 그에게 차철구선생의 타계를 알리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예전과 다르게 사모님이 전화를 받았다. 한참후 전화를 받은 선생의 목소리가 너무나 잦아있었다. 그는 차철구선생의 타계를 극히 슬퍼하면서 마침 나에게 전화를 하려던 참이라면서 요지음 나를 보고싶다고 하였다. 그날 오후는 행사가 있었기에 이튿날 그를 뵈옵으려고 저녁 7시에 그의 자택에 전화를 걸었더니 이제 금방 자제분이 변철호선생을 모시고 입원하러 갔다고 사모님이 말했다.


변철호선생의 병세호전을 기다려 9월 4일 오후 나는 그의 병실을 찾았다. 눈을 간신히 뜬 선생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었기에 알아듣기 어려웠다. 목에 힘을 주어 끊어져 나오는 한마디 또 한마디 말, 내가 예상했던대로 늘 평소에 이야기했던 그의 소원내용이였다.


《살아있는 장춘의 민족력사》라면서 타계한 류연산씨는 생전에 장춘을 자주 다니면서 변철호선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류연산씨는 장춘하면, 변철호선생을 들먹이였다.


선생에 대한 류연산씨의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것이다. 그는 장춘조선족들의 혁명투쟁사와 관련인물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있고 연구가 있는분이다. 하여 그를 장춘조선족력사연구가라고 칭해도 과분하지는 않을것이다.


왜서 선생은 장춘조선족의 력사와 관련인물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가지는가? 이것은 선생의 성장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이다.


1928년, 선생은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동년과 소년은 만주국시기였다. 일제의 잔인무도함은 늘상 그의 경악을 자아냈고 항일투사들의 용감한 희생정신은 그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총명하고 선동력이 있는 그는 학업에 뛰여났지만 가정이 너무 어려운 탓으로 아쉽게도 초중을 중퇴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시기 그는 일제의 헌병들로부터 무수한 멸시와 모욕을 당하였다.


1945년 《8.15》광복은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었고 중국인민해방군의 동북진출은 그에게 휘황한 전망을 펼쳐놓았다. 지식이 있고 정의감이 넘치며 열정이 높은 그는 1946년에 리홍광지대에 참가하였고 1947년 여름에는 해룡현 토지개혁공작단 성원이 되였다. 그 당시 해룡현 토지개혁공작단은 남만지구 토지개혁 시범공작단이였기에 지도력이 강했고 단원 총수는 50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50여명이 되였는데 선생은 유일하게 대부(隊部)에서 비서작용을 하는 출중한 인물이였다. 그의 옳바른 정치리념과 사업성과로 조직의 인정을 받아 그해 12월, 19세의 나이로 입당의 영예를 지녔다.


그때로부터 그는 조직의 수요에 따라 어디를 가도 한몫을 잘 막아내는 우수한 공산당원이였다. 하여 그의 사업전근은 빈번하였다. 짧은 2년동안 그는 선후로 해룡현조선인민주련맹 선전간부, 료서성인민정부 민족과 간부, 회덕현인민정부 민족사업과 당지부조직사업으로 활약하였다. 회덕현에서 몇달 안되는 기간에 그는 회덕현조선족중학교, 회덕현민교관을 창설하였다. 특히 그가 창설한 회덕현수전농민합작사는 당시 길림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나타난 합작사로서 전 성 기타지구의 본보기로 되였다.


선생의 뛰여난 사업실력은 백성들의 찬양을 받았고 조직의 중시를 받았다. 하여 1950년 봄, 그는 22세의 나이로 길림성 당위 민족사업일군으로 승진을 하게 되였다. 호사다마라고 할가, 한사람이 너무 빨리 진보를 하면 왕왕 동료들중에는 축하대신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두 동족간부의 음모조작으로 그에게는 민족주의분자란 억울한 루명이 씌워져 당적을 박탈당하고 1년간 옥고까지 치루었다.


하지만 조직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조직의 안배로 그는 1952년부터 1960년까지 길림성행정간부학교, 연변대학 조문학부,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에서 진학을 하였고 대학공부를 마친 그는 교편을 잡았다.


혁명사업에서 좌절을 당하고 대학공부와 교편을 잡은 39년동안 그의 인생신앙은 변함이 없었다.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관한 책을 읽는것이 그의 가장 큰 흥취였고 교원시절 일요일이면 서점을 돌면서 상기의 책을 모으는것이 그의 흥취였다. 렬사들의 희생정신은 언제나 그를 고무하는 정신의 힘이였다. 렬사들에 비하면 자신은 언제나 행운아라고 생각하면서 비관을 버리고 락관적으로 살아왔다. 개혁개방후인 1982년 3월, 조직에서는 선생에 대한 처분을 철소하고 당적을 회복시켰다. 꼭 32년만에 루명을 벗고 해빛을 본것이다.


1989년 9월, 선생은 61세로 리직을 하였다. 리직은 그가 하고싶은 일을 할수 있는 전환점이였다. 그의 관심사는 줄곧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시기 조선족영웅인물과 렬사들에 관한 자료수집작업이였고 또한 그들을 위해 우리들이 응당 해야 할 일들이였다. 때문에 리직후 그는 재직시보다 더 바삐 돌았다. 북경, 심양, 길림, 연변, 환인, 림강, 사평 등지와 자주 련락을 지어 한달의 전화료금이 늘상 400원이 넘어났다. 그래서 조선족학계는 선생을 알게 되였다.


기회는 언제나 준비있는 사람을 찾는 법이다. 지난세기 90년대 중요한 문헌인 《중국조선민족력사발자취(아래 발자취라 줄임)》(제5권)편찬임무가 그에게 내려졌다. 평소에 수집한 많은 사료(史料)들이 《발자취》편찬에 큰 도움이 되였고 평소에 자주 련락이 있는 분들이 또한 큰 힘이 되였다. 그는 관련학자, 관계인사들의 지지와 합심으로 몇년의 시간을 거쳐 50만자가 되는 이 민족력사저서의 편찬작업을 원만히 완성하여 민족력사기록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94년 4월에 그가 채규억선생, 김수영선생 두분과 손잡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족 《로인문고》를 창간한것도 이 진지를 통해 로인들께 민족사를 알리고 혁명렬사들을 잊지 말자는것이 주된 취지였다. 이 《로인문고》는 편집실이 없고 전문편집이 없으며 경비보장이 없는 《삼무》상태에서 창간되였다. 선생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었고 잡지발행을 위해 자전거로 추운 겨울에도 장춘시내를 누비였다. 1995년에는 《로인문고》의 주최로 동북조선족로인사업교류회를 가졌는데 동3성의 40여명 로인대표들이 참석한 이 모임은 중국에서 처음인 조선족로인전문회의이기도 하였다. 4년동안 《로인문고》는 총 20기를 출판하여 전국 조선족로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1997년 2월 6일 섣달 그믐날, 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로인문고》인쇄비를 결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얼음판에 넘어져 다리상을 크게 입게 되여 잡지는 더 나올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였다.


선생은 비록 지팽이에 의지하여 간신히 움직이는 몸이였지만 민족사와 혁명렬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였다. 2006년, 654명 혁명렬사들이 묻힌 길림시 화피창렬사릉원의 관리가 허술해 볼모양이 없게 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가슴이 아팠다. 선생의 건의로 장춘, 길림, 연변 등지의 8개 사회단체는 련명으로 《화피창렬사릉원을 재건하고 관리를 강화할데 관한 건의》를 길림성 인대 10기1차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후 인대 대표들의 계속적인 호소로 이 건의가 2009년도 길림성 인대 10대 건의안이 되여 그해 10월에 릉원은 새옷단장을 하게 되였고 애국주의교육기지로 되여 지금은 관리도 잘 되고있다.


년세가 점점 높아지고 신체는 점점 쇠약해져 지금은 눈도 안좋아 바깥출입도 못하는 상태에서 선생은 자신이 가지고있는 많은 자료에 대해 2년전부터 고민을 하였다. 이 일때문에 그는 나에게도 몇번 전화를 걸어와 의견을 쟁취하였다. 그후 그는 안해 김애숙씨의 도움으로 자신이 보배로 간주한 자료와 서적들을 정리하여 길림대학, 대련민족학원과 길림신문사에 기증하였고 오래된 《세계문학》은 특급우편으로 나에게 보내여왔다.


장춘태생이 아니지만 장춘에서 거의 한생을 보냈고 또 장춘의 민족사에 대해 연구가 깊은 그는 곧 《살아있는 장춘의 민족사》이다.


《조선족을 알려면 장춘을 알아야 한다. 많은 조선족들이 장춘을 거쳐 고위층 지도간부가 되였고 또 많은 조선족들이 장춘을 통해 과학, 경제, 문화 인재가 되였다. 장춘은 국내외 수많은 우리 민족인물들이 활동했던 중요한 력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과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해방전 장춘에서 활동하였다.》 이 말은 선생이 평소에 늘상 하는 말이다.


새천년에 들어서서 선생은《장춘조선족》을 편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지기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모두들 대찬성이였다. 하여 2001년부터 그는 최규억, 림청백, 리석기 등 《로장춘(老長春)》들과 함께 자료수집작업을 하였고 동북사범대학 력사학부 권혁수교수가 원고정리와 통고(統稿)를 하였다. 하지만 이 사전은 사정으로 인해 줄곧 해빛을 보지 못하고 2005년에는 민족학자 차철구선생의 손으로 넘어갔다.


시간이 흘러도《장춘조선족》은 계속 출판이 되지 않았기에 2010년부터 차철구선생은 또 자료보충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였다. 2015년 그가 타계하기 직전, 그는《장춘조선족》과 《중국조선족인물록》을 원만히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두책 역시 해빛을 보지 못했기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병석에 누워있는 변철호선생은 차철구선생의 타계를 심히 비통해 하였다. 금년에 87세 고령인 변철호선생의 소원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장춘조선족》의 출판을 보았으면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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