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장호준 칼럼니스트
어려서 동네에서 야구를 했습니다.
모두가 경험 해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만, 신나게 공을 쳤고, 공은 공터를 벗어나 남의 집 담장 너머로 날아 들어갔습니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은 일사분란하게 도망 쳤지만 대문을 박차고 뒤쫓아 달려 나온 집주인에게 결국 몇몇 녀석들이 붙잡혔습니다.
집주인은 “이놈 자식들! 다시 또 여기 와서 야구 하면 그 때는 정말 혼날 줄 알아!”라고 하면서 녀석들의 머리통을 한 대씩 쥐어박고 보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나는 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말했습니다.
“넌 재들처럼 놀면 안 돼, 너희 아버님이 어떠신 분이신데, 네가 이렇게 놀면 되겠니?”
억울했었습니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그냥 한 대 쥐어박고 보내주면 될 것을 꼭 아버지 이름을 꺼내는 것이 싫었습니다. 난 난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환갑(還甲)이 된 오늘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로 삽니다. 아니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 위해 삽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기에 더욱 어머님, 아버지의 자식이 되기 위해 삽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처럼 ‘아랫물을 보면 윗물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방정오의 딸을 보면 방정오를 알 수 있고, 방상훈의 아들을 보면 방상훈을 알 수 있듯, 방일영의 아들을 보면 방일영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내나이도 환갑인데
1988년부터 1994년까지 싱가폴에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흔히 말하는 선교사(宣敎師) 사역을 했었습니다.
올림픽 이후 노태우의 관심돌리기용 여행자유화가 시작 되면서 관광객들이 물밀 듯이 빠져나왔지만 당시는 멀리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지라 모두가 동남아시아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심지어는 신학교 학생들조차 ‘단기선교여행’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달고 비행기를 탔고 선교사라는 이름 달린 자들이 몇 안 되었던 시절 이었던 덕에 어찌 알았는지 내게 연락을 해서 ‘단기선교’ 신학생 팀을 받아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었습니다.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누구 선배, 어느 교회, 아는 장로 등등 이름을 들먹이며 요청을 하는지라 새끼 목사였던 나로서는 딱 잘라 거절 할 수 없었습니다.
신학생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싱가폴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짐 속에 들어있는 음식들을 다 꺼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어 번 해 보고 나니 대략 어떤 것들을 가지고 왔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한 번도 내 예상을 벗어났던 적이 없었던 것은 언제나 고추장, 김, 라면은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두 꺼내 놓게 한 후 나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사역을 하는 기간 동안은 여러분들은 현지 사람들을 그들과 동일한 문화로 접근해야 하며 그 문화동화의 첫 관문은 음식입니다. 그러므로 사역 기간 동안은 한국 음식을 전혀 먹지 않을 것 입니다. 더하여 여러분들이 가지고 온 이 한국 음식들은 나를 위한 것으로 알고 내가 두고두고 잘 먹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후, 말레이시아, 타일랜드,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을 끌고 다니면서 전혀 한국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음식문화 적응에 심각한 아이들의 경우는 독특한 향과 맛을 내는 동남아시아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몇 일간 물만 마시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석 주 또는 넉 주간의 사역 기간을 끝내고 돌아 갈 때는 모두들 반짝이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선교지역과 이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여행전문가도 문화연구가도 아니지만, 여행은 문화와의 동화(同化)라고 생각합니다. 현지 문화와 동화 할 수 없다면 아니 동화되기를 거부 한다면, 방에 앉아 OB 맥주와 주문진 오징어를 먹으며 텔레비전으로 여행을 하면 될 것이지 굳이 시간, 돈, 열정을 쏟아 부으며 현지로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해외여행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라는 여행, 시간을 따라가는 여행, 역사를 이어가는 여행 역시 그 시간과 역사의 문화에 동화되지 못 한다고 하면 아니 동화 되기를 거부 한다고 하면 결국 여행을 떠나는 목적도, 떠나야 하는 필요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여행을 떠나면서 시간과 역사의 문화에 동화하지 못 합니다. 아니 동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속된 말로 ‘꼰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한글 낙서를 남기는 이들이나, "국민의 반이 나를 지지한다“며 정계복귀를 하겠다는 홍준표나 표면은 다를지 모르지만 내면은 역시 문화동화에 실패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내 나이도 환갑인데, 어찌 해야 ‘꼰대’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 해 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장호준의 Awesome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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