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오전 7시, 걸어서 인터내셔널 서비스샵으로 갔다. 수리가 끝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가이암은 움직인 흔적이 없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프라임 트럭이 많이 밀려있어 수리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 중으로는 수리에 들어갈 것이라 했다. 이런.
프라임 트랙터샵에 전화했다. 오늘 오전 4시30분 약속인데 아직까지 전화를 못받았다. 지금 인터내셔널에 있지 않느냐? 그렇다. 야드에 있는 트럭만 우리 샵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 4시반에 확인하니 인터내셔널에 있길래 연락 안 했다. 나는 수리가 필요하다. 그럼 야드로 와서 연락해라. 지금 당장 가겠다.
프라임 터미널로 돌아가 전화하니 바로 25번 베이를 지정해준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했네. 그래도 혹시 몰라 예약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정비사에게 수리가 필요한 부분을 설명했다. 젊은 정비사는 시키지도 않은 디어 가드부터 수리했다. 좀 덜렁거리고 앞으로 기울어지긴했다. 그다음은 녹색 전원 케이블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빨간색 케이블은 교체하지 않았다. 대신 줄이 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지지선을 새로 연결했다. 다른 트럭들은 다 갖추고 있는 도구다.
밀레니엄 빌딩에서 운동과 식사를 하고 다시 가보니 정작 중요한 APU는 고치지 못했다. 인터내셔널에 가면 되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APU는 인터내셔널에서 함께 나오는 제품이 아니다. 다른 트럭에서 중고 APU를 떼어다가 가이암에 교체해 달기로 했다. 자기는 제거 작업만 하고 설치는 야간조가 와서 할거란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인 데다, 침대 바닥을 열어야 해서 짐을 치우고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나는 벙커룸을 다시 얻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인터내셔널로 갔다. 내 트럭 열쇠를 달라. 트럭 가져가지 않았나? 열쇠는 여기에 있다. 스페어 키를 사용했다. 열쇠를 받아 다시 걸어왔다. 오늘 운동 많이 한다.
오늘도 영화 한 편 봤다. 어벤저스 시리즈 중의 하나인데 온갖 마블 캐릭터가 총출동했다. 오늘은 세끼를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트럭이 수리 중이니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었다.
저녁 먹으며 트럼프 대통령 의회 연설을 시청했다. 2년만에 많이 점잖아졌다. 작년에는 웜비어 부모를 부르더니 올해는 북한과 2차 정상회담을 하겠단다. 한반도 평화는 환영이다.
11시 30분, 책을 읽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수리가 끝났단다.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린다. 하필 이때. 새로 설치한 APU는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내가 쓰던 APU는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견디다 망가진 것이었다.
드라이브 라인에 갔다. 화물이 있나? 검색하더니 일리노이로 가는 화물이 있단다. 자정까지 배달하면 된다고. 9시간 걸리는 거리다. 비는 새벽 2시를 넘어가면 그친다고 예보됐다. 새벽 3~4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오전 6시부터는 다시 비가 내린다. 터미널에서 빈 트레일러를 끌고, 근처 발송처로 가 화물이 든 트레일러와 교체한다. 배달처도 드랍 앤 훅이다.
본사 터미널을 드라이버들은 모선(mother ship)이라고도 부른다. 항공모함이 비행기를 품듯이 트럭을 품고 있다 밖으로 내보내기 때문이다. 설비나 편의시설도 외부 트럭스탑과 비교가 안 된다. 설 연휴를 모선에서 잘 보냈다. 이제 당분간은 외부에서 계속 일할 작정이다.
너를 놓아줄게
새벽 3시, 비는 그쳤다. 벙커룸을 정리하고 열쇠를 반납했다. 야드에서 트레일러를 찾아 연결하고 발송처로 향했다. 빈 트레일러를 내려놓고 가져갈 트레일러를 연결한 순간 깨달았다. 빈 트레일러의 텐덤 타이어를 뒤로 물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귀찮은데 그냥 갈까? 아니다. 바로 잡자. 모든 일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 발송처를 출발하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밤에 잠을 못 자서 졸렸다. 고속도로 진출로 갓길에 세우고 1시간 이상을 잤다. 다시 힘을 얻어 출발했다. When never comes라는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갔다. 처음에는 지루했는데 뒤로 갈수록 이야기 전개가 흥미로워졌다.
배달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인디애나주로 가는 화물이 들어왔다. 배달처 겸 발송처다. 원래는 드랍 앤 훅이지만 트레일러가 없다며 내가 가져간 트레일러에서 짐을 내리면 거기에 싣기로 했다. 5번 도어를 배정받았다. 짐 내린 후에 다른 도어로 이동할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짐을 싣도록 편의를 봐줬다.
짐 내리고 싣기까지 거의 자정(子正)이 됐다. 이미 내 14시간은 지났다. 오전 3시 30분이 지나야 운전이 가능하다. 이곳은 오버 나이트 파킹이 안 되는 곳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운전할 수도 없고 근처에 마땅한 주차 장소도 없다. 자정을 넘어서자 야드도 조용하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침까지 있다가 가기로 했다. 배달지까지는 4시간 거리도 안 된다. 월마트라서 일찍 가도 소용없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미스테리 범죄 소설 ‘너를 놓아줄게’를 다 읽었다. 경찰 출신 작가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쓴 작품이다. 데뷔작인데도 구성이 탄탄하고 반전도 흥미롭다. 범인이 누구냐 하면 말이지.... 라고 스포일러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직접 읽어보시라.
새로 고친 APU는 열심히 잘 돌아간다.
징크스
인디애나주 앤더슨에 있는 네슬리 공장이다. 지난번 강추위 때 얼어 죽을 뻔했던 그곳이다. 오늘도 비슷한 상황이다. 오늘 낮까지도 작동하던 벙크 히터가 전원이 안 들어온다. 저번 같은 살인적 추위는 아니지만, 오늘도 영하의 날씨다. 쉴새 없이 트럭을 흔들어대는 바람까지 가세했다. 체감 온도는 그때와 비슷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APU가 작동해서 전기스토브를 히터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다. 실내 공간을 데우지는 못해도 손발을 녹일 정도는 된다. 원래는 APU도 에러가 발생하며 안 돌아갔다. 며칠 전 APU 수리할 때 유심히 봐둔 덕분에 그 오류(誤謬)는 잡을 수 있었다. APU와 히터가 둘 다 작동 안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전기스토브라 안전장치가 없어 자다가 뭐라도 태울까 봐 걱정이다. 약간의 훈기라도 느껴지니 좋다. 실내 온도도 1도 정도 올라간 것 같다. 잘 때는 뜨거운 물을 채운 핫팩을 써야겠다.
원래 이곳 약속은 내일 정오인데 오늘 자정으로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체크인을 하려니 16시간 후에 오란다.
오늘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가이암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에러 메시지를 나타냈다. 히터가 나간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에 쓰던 APU는 작동 시간이 16,000시간이다. 새로 바꿔 단 APU는 작동 시간이 8,776시간으로 거의 절반이다. 그래서인지 돌아가는 소리도 조금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이번 화물은 메릴랜드로 간다. 시간 여유가 많을 줄 알았더니, 내일 정오에 짐을 실으면 그렇지도 않다.
저절로 영어
조그만 스토브가 꽤 역할을 한다. 추워서 깼더니 온도가 화씨 46도다. 새벽이라 기온이 더 내려가기도 했겠지만, 어제 잘 때는 56도였다. 다시 스토브를 켰다.
기계적 결함보다는 휴즈가 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어제 RA가 APU를 열고 점검을 해보라는데, 휴즈박스 위치가 안쪽이라 연장 없이 휴즈를 뺄 도리가 없다. 연장이 있어도 춥고 어두워서 작업하기가 쉽지 않다.
핫팩 끌어안고 자다가 중간에 한 번 더 데웠다. 추운 날 밖에서 자는 노숙자들은 어떻게 견딜까?
정오에 체크인하니 입장이 가능했다. 내가 가져갈 트레일러는 막 짐을 실은 모양이었다. 야드에 트레일러 내려놓고 있자니 야드자키가 다가왔다. 14번 도어의 트레일러 가져갈거냐? 그렇다. 트레일러 문도 닫고 실도 채웠으니 그냥 끌고 가면 된다. 알았다. 야드자키가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차에 내가 체크인을 한 모양이다. 트레일러는 도어에서 1.5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중간에 TA에 들러 한번 점검을 해보려 했다. 200대 규모나 되는 큰 트럭스탑인데도 유료 주차공간 외에는 자리가 없었다. 하루 더 히터 없는 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 집에 가면 전기요를 가져와야겠다. 공기가 차가워도 등이 따뜻하면 얼마나 좋은가. 어렸을 때 시골 큰집에 가면 창호지 바른 문틈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코가 시리고 입김이 났다. 방구석에 놓아둔 물그릇은 다음날이면 얼었다. 그래도 군불을 지핀 온돌이 따뜻해 잘 잘 수 있었다.
내일 오전 5시에 출발하면 10시경에는 또 다른 TA에 도착한다. 낮이니까 자리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10시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벙크 히터를 수리할 작정이다. 만약 수리가 안 되면 다시 터미널로 가야 하는데, 주말에 북동부 지역에 큰 눈이 예보돼있다. 가급적 북동부는 피하고 싶다. 이 경우 월마트에서 전기난로나 전기담요를 사야겠다.
오늘은 새로운 오디오북을 들으며 갔다. 시리즈물인 모양이다. My sister’s grave. 여형사가 주인공인데 20년전에 살해된 여동생의 진범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 오디오북이 좋은 점은 나레이터가 전문 성우라 목소리 연기를 잘한다. 인물들의 감정을 잘 표현하면서도 발음은 정확하다. 오디오북을 들으니 여러 장점이 있다. 소설의 경우 12시간 정도 재생시간이 나온다. 이틀 정도 운전하며 듣기에 적당한 분량이다. 원서로 읽으면 이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잘 넘어가지 않고 다시 앞으로 간다. 원어민은 3시간 걸려 읽을 분량을 나는 3일이 걸려도 못 읽는다. 그런데 오디오북은 무조건 넘어간다. 내가 이해를 했든 못했든. 이해가 안 된 문장을 그냥 넘어가도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나 미드로 영어 공부하는 방법이 유행이다. 종일 운전하는 내 입장에서는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공부하는 쪽이 더 장점이 많다. 일단 듣는 분량이 많다. 2시간짜리 영화라도 대사는 1시간도 안 될 것이다. 오디오북은 10시간짜리면 10시간 모두 나레이션이나 대사다. 또 정확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고급 영어 실력을 쌓을 수 있다. 회화는 유창하게 하는 것 같은데 잘 들어보면 문장 구사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운전하는 내내 오디오북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그냥 배경음처럼 틀어 놓는다. 그래도 들릴 것은 들린다. 한국어는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귀에 들어온다. 영어는 귀를 기울여야 들린다. 내 목표는 영어도 한국어처럼 저절로 들리는 단계다.
흔히들 씹어 먹는 공부라 해서 문장 하나하나를 다 외우는 방법으로 공부하라고 권한다. 영화 한 편을 서른 번에서 백 번 정도 보라고 한다. 그게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현실적이지는 않다. 같은 내용을 그 정도로 반복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라도 대사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어 소설을 문장 전부를 암기하며 읽지도 않는다. 그런데 영어로 된 영화나 책은 그렇게 공부하라니 성공하는 사람이 드물다.
나는 저절로 영어를 추구한다. 저절로라 해서 노력 없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느는 영어다. 영어공부가 고통스러워서는 지속할 수 없다.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 아직 내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중에 다시 들으면 그때는 이해가 된다. 50% 이상 들리거나 대략 줄거리를 좇아갈 수 있을 수준의 문장이면 적당하다. 나는 오디오북을 들었을 때 80% 정도 이해를 목표로 한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실력이다.
소설 오디오북은 영어공부 외에도 소설을 쓸 때 이야기 구성을 어떻게 하는지 공부도 된다. 나는 아마존의 Kindle Unlimited와 Audible 서비스를 이용한다. 유투브에 찾아보면 오디오북을 통째로 올려놓은 것도 제법 있다. 영어학원, 영어교재에 비싼 돈 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공부하며 문학적 소양도 쌓을 수 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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