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나는 두려움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5)
Newsroh=안정훈 칼럼니스트
나이 들어 여행을 하려면 필요한 3가지 기본 조건이 있다. 경제력, 체력, 시간이다. 추가적으로 꿈, 의지, 약간의 외국어 능력에 더 욕심내자면 디지털 능력까지 있으면 더 좋다. 나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건강과 체력이었다.
고혈압, 당뇨병은 15년 넘게 함께하는 친구다. 과민성 장염이 심해 술 마신 다음날은 잦은 설사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중간 역에서 뛰어내리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고속도로에서 갓 길에 차를 세우고 일을 보기도 했다.
내시경을 찍어보면 건강한 노란색은 아주 적었고 염증으로 생긴 붉은색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 콜레스테롤, 지방간, 비만, 방광 확장증, 심한 잇몸 통증이 나를 힘들게 했다. 다뇨증으로 2시간 이상 가는 장거리 버스는 타지 못했다. 불면증으로 나보다 아내가 더 힘들어야 했다. 술을 마셔도 운동을 해도 잠 못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적처럼 낫긴 했지만 족저근막염도 심하게 앓았다. 만성 피로와 무기력증도 심했다. 감기 몸살이 자주 걸렸고 한번 걸리면 3주 이상씩 오래 낫지 않았다. 그런데도 날마다 폭탄주와 흡연이 이어졌다. 사는 게 재미없었다. 실체도 알 수 없는 답답증 때문에 차츰 우울지고 있었다.
혼자 떠나기로 작정하고 나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건강 문제였다. 저질 체력으로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냥 천천히 가다 힘들면 쉬고 그래도 안 되면 돌아오면 되지”라고 편하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한 달치 고혈압 약과 당뇨병 약 그리고 구급약을 처방받아 준비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평소에는 잘 먹지 않았던 비타민과 건강 보조제를 챙겼다. 약을 준비했다고 문제가 풀리고 걱정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러시아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 나는 아날로그 세대라 디지털 세대처럼 비행기, 열차, 버스, 배, 숙소. 우버 등을 인터넷으로 예약할 줄도 모른다. 구글맵이나 맵스미나 구글 번역기도 사용할 줄 몰랐다. 론리플래닛 세대의 홀로 여행은 고달프다.
믿을 건 인생의 경륜뿐이었다. 그 때 우연히 읽은 시 한 편이 큰 용기와 힘을 주었다.
여행은 혼자 떠나라
박노해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사람들 속에서 문득 내가 사라질 떄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말을 잃어 갈 때
달려가도 멈춰 서도 앞이 안보일 때
그대 혼자서 여행을 떠나라
존재감이 사라질까 두려운가
떠날 수 있다는 용기가 충분한 존재감이다
여행을 떠날 땐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그러나 돌아올 땐 손잡고 오라
낯선 길에서 기다려 온 또 다른 나를 만나
돌아올 땐 둘이서 손잡고 오라.
15,000시간, 627일간의 방랑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좁게 보면 우연이었지만 크게 보면 필연이었다. 필연성은 항상 우연성을 수반한다.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서양 철학서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인간이 죽는다는 현상은 필연이지만 A가 언제 어느 곳에서 사고(事故)로 죽는 것은 우연이다. 즉 필연이 우연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A가 그 장소에, 그 시간에 다른 사정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우연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우연은 온갖 필연의 매듭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은 반대 개념 같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로 얽혀 있다.
나의 긴 방랑도 우연하게 시작됐지만 내 운명의 필연이었던 것이라고 믿는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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