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파리강화회의 독립을 청원하기위해 참가한 독립운동가들 김규식(앞줄 오른쪽) 임시정부 외무총장, 여운홍(여운형의 동생 앞줄왼쪽), 이관용(뒷줄 왼쪽에서 두번째)파리위원부 부의원장, 조소앙(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황기환(뒷즐 오른쪽) 서기장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이 종결된 후, 전후 처리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주도로 약 5개월간의 기본 협의(평화회의)와 패전국과의 조약 협상(강화회의)이 진행되었다. 이를 한데 모아 ‘파리평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라고 지칭한다.
조약 체결을 위한 일련의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기 때문에 파리강화회의라고도 하며, 독일에 대한 강화 조약은 조인식 장소 이름을 따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이라 한다.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던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Woodrw Wilson)이 1918년 1월 18일에 발표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 14개 조항에 입각한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다.
해외의 여러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은 파리평화회의에 지대한 희망을 걸고 대표를 파리에 파견하고자 했다.
미국에 있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1918년 10월 1일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회담에 보낼 대표 단원으로 선출하였다.
1918년 12월, 중국 상해에서는 여운홍, 장덕수, 조동호가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상해를 방문한 크레인(Crane)을 만나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국 독립 요청서>를 전달했다.
일본 주재 프랑스 대사가 파리 외무부에 보낸 암호 전문을 보면, 미국에 망명해 있는 한국인들이 파리평화회의에서 민족 자결권을 쟁취하기 위해 이승만이 대표가 되어 곧 파리로 갈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대표 단장으로 지명된 이승만은 1919년 1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회장 안창호(安昌浩)로부터 신임장을 받고, 워싱턴으로 가서 정한경(鄭翰景)일행과 합류했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파리행 비자를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미국이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아 결국 이들의 파리행은 좌절되었다.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에서는 한인신문 발행인 윤해와 고창일을 1919년 2월 파리로 출발시켰다. 도쿄 주재 프랑스 대사가 받은 전문을 보면, 이들이 몽골을 거쳐 혁명으로 소란한 러시아를 북쪽으로 돌아, 노르웨이, 영국을 거쳐 파리에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그들은 이렇게 육로를 통해 파리에 도착했는데, 그때는 이미 파리평화회의가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9월 26일이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대표 김규식(金奎植) 외 3명을 파리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정부는 파리 주재 일본 대사관을 통해 프랑스 정부에 한국인으로서 일본 여권 혹은 비자를 소지하지 않은 자의 프랑스 입국을 거부해 달라는 요청을 기밀문서로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하여, 3월 13일 무사히 파리에 도착했다.
임시 정부 파리 위원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 열강들과 국제 연맹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파리 위원부의 활동은 상해 임시 정부의 프랑스 조계(租界) 시절인 1919년부터 1932년까지 서구에서 펼친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꼽힌다.
파리에 도착한 대표단은 일본의 방해로 프랑스 정부 수뇌부와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대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프랑스 지식인들, 중국인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그들은 탄압받는 약소 민족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여러 경로로 도움을 주었다. 또한 대표단은 평화회담 중국 대표 왕정정과 리석정의 협조도 받을 수 있었다.
주프랑스 일본 대사관의 강력한 요청으로 프랑스 외무부는, 내무부의 정보 기관에 김규식의 활동과 행적을 조사하도록 했다.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자료에 따르면, 내무부 안전국(Direction de la sûreté)이 조사하여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내용의 골자는 이렇다.
1881년 1월 21일 서울 출생인 친칭웬(Chin Ching-Wen, 김규식을 말함)은 중국에 귀화한 중국 국적자로, 또 다른 3명의 한국인 학생 김탕(Tchang Tai-Chuin), 조소앙(Sho Yu-Tou), 여운홍(Yi Yeou-Tchuen)과 함께 1919년 3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파리 교외의 고급 주택가 뇌이이(Neuilly-sur-Seine)의 부르동 가(boulevard Bourdon, 현재는 Boulevard du Général Leclerc) 2번지, 중국인 사회 운동가인 리유잉(Li Yu-Ying)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다. 1880년 5월 6일 북경 태생인 리유잉은 중국의 전 외무장관 아들로, 프랑스 주재 중국 공사관 서기 자격으로 파리에 왔으며 투르(Tours)에서 중국어 잡지 2종을 발간하고 있다.
이들은 하루 종일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받은 편지들 가운데는 하원 의원들로부터 온 것도 있고, 평화회담의 두문(頭文)이 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들은 4월 중순에 사무실을 파리 9구 샤토덩 가 38번지 1층(프랑스식 0층)으로 옮겼고 여기서 외교 및 홍보 활동의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한국 국내에서는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서거했다.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영사 갈로아(Gallois)의 전언에 따르면 총독부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다음날 발표했다고 한다. 고종 황제가 일본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3월 1일이 고종 황제의 장례일로 정해졌고, 이날을 기해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갈로아 영사는 그의 보고서에서 그날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으며, 일본 주재 프랑스 대사도 3·1 운동의 의미를 프랑스 외무부에 보고했다.
【프랑스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