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일, 파리 9구 샤토덩(Chateaudun) 가 38번지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파리 위원부 현판을 걸었다.
김규식 일행이 파리에 도착했지만,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일 뿐 정식 국가의 대표 자격은 아니었다. 따라서 김규식이 국가의 대표로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루 빨리 국가 대표의 자격을 부여해야 했다.
따라서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4월 11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 concession française) 내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4월 13일 이를 공포했으며, 같은 날 파리에 있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 위원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신임장(lettres de créance)을 보냈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외국 국가의 승인을 받은 독립된 국가가 아니었기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은 파리 위원부의 활동이 많아지자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유학하던 이관용과 독일에 있던 황기환을 파리로 불렀다. 황기환은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미군 소위로 참전, 베를린에 주둔한 바 있다.
파리 위원부는 평화회의 참가는 불가능했으나 많은 자료를 발간하여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대표단의 중요한 첫 활동은 7쪽에 달하는 ‘한국의 요청(réclamation)’, 13쪽의 메모란덤, 3쪽의 첨부 자료 작성이었다.
위원부는 이 자료를 프랑스 내각 수반 겸 평화회의 의장인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émenceau), 프랑스 내각의 각부 장관들,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태리 수상 비토리오 엠마뉴엘레 오를란도에게 보냈다.
요청서에서 위원부는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내각 구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메모란덤에서는 일본과 조선이 체결한 합방 조약은 원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인들이 조선 총독 테라우치 장군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진행 중인 소송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해관계에만 급급했던 열강들의 냉대와 일본의 방해로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한국의 요구를 옹호하고, 서구에서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여론을 환기시킨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파리평화회의 이후의 활동과 방향 변경
파리평화회의에서는 큰 성과를 보지 못했지만 위원부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7월 7일 김규식은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한국 대표단 3명을 프랑스 혁명 기념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또한 7월 16일에는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중국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경찰이 한국인 2명을 체포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주중 프랑스 대사가 일본 당국에 이들의 석방을 요청하도록 조치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대한 회신을 받지는 못했다.
7월 28일 위원부는 파리의 정치학회(Société des sciences politiques)에서, 7월 31일 동양학 학회(Société des études orientales)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부단히 전개했다.
그러나 평화회의가 끝난 후 1921년까지 위원부의 인원은 계속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활동 방향도 변경되었다. 위원부는 국제 연맹으로부터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김규식은 김탕, 여운홍과 함께 1919년 8월 8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김규식 일행이 떠난 후 이관용이 위원장 대리를 맡고, 황기환이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9월 26일에는 시베리아에서 윤해, 고창일이 파리에 도착, 위원부에 합류했다. 10월 10일 이관용이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돌아가자, 황기환이 위원장 대리와 런던 주재 위원을 겸하게 되어 파리와 런던을 오가면서 활동했다.
파리 위원부, 유럽에서의 활동과 성과
국제 무대의 활동으로 위원부는 1919년 8월 4일 조소앙(Tjosowang)과 이관용을 스위스 루체른(Lucerne)에서 개최된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에 파견했다. 이 회의에는 25개국이 참가했다. 여기서 한국 대표들은 한국 독립 승인안과 한국의 요청에 대한 연대성을 가결시켰다.
루체른 회의 후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 집행 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루체른 회의에서 가결된 사항의 이행 수단을 규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회의에 조소앙이 참석하여, 3·1 독립선언이 민족 자결권의 원칙에 기초를 둔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의 결정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위원회는 국제 연맹과 각 참가국 대표들이 자국의 의회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채택하도록 요청했다. 이 결정에 따라 브뤼셀의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 본부는 열강들의 정부에 이의 이행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상해 임시 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년 4월 6일 자 호외를 발간하여 이 사실을 전했다.
1919년 9월에 임시 정부는 워싱턴에서 주미 프랑스 대사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계속>이란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는 12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개요, 정부의 구성, 채택된 의회 제도, 민병 창설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9월 26일에도 주미 프랑스 대사는 파리의 외무부에 미국 상원의 회의록을 보냈다. 그 문서에는 한국 정부 고문 도르프(Dorff)와 언더우드(Underwood)가 제출한 한국의 요구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1876년 이후 한국이 체결한 주요 조약의 발췌와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0월에는 파리 위원부 이름으로 평화회의 의장에게 「한국 독립 승인의 요구」라는 문서를 보냈다. 이 문서에는 “한국은 일본에 의한 어떤 형태의 자치도 원하지 않으며, 어떤 정부, 어떤 지배도 원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한국은 절대적인 독립만 원한다”며 <더 타임스(The Times)> 기사를 인용, “자치는 일본의 외교적인 속임수에 불과하며, 전 세계 언론이 일본의 기만에 속지 말라”고 탄언했다.
1920년 1월 4일에는 국제평화촉진회가 주최한 주프랑스 중국 사회단체 연합 회 대회에서 윤해와 고창일의 환영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위원부 대표들은 ‘1910년 한일합방 조약 취소 및 한국 독립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며칠 후인 1월 8일에는 파리의 생-제르맹(Saint-Germain) 가에 있는 프랑스 지리 학회(Société de la géographie) 강당에서 파리 대학교 올라르 교수의 주재로, 인권 연맹과 한국 위원부가 공동으로 ‘한국 및 중국 문제 여성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각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는데, 파리 대학교의 펠리씨앙 샬래(Félicien Challaye) 교수와 중국인 사회운동가 사동발(謝東發), 무테(Moutet) 하원 의원이 한국 실정을 소개하고 일본에 의한 한국인 인권 유린을 규탄했다. 샬레 교수는 1919년에 한국을 여행하면서 자기 눈으로 목격한 일본에 의한 인권 유린 사태를 비판했다.
1920년 1월 15일에는 스위스에 유학 중이던 이관용이 대한적십자사(1907년 창립) 유럽 지부장 자격으로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적십자사 총회에 참석하여, 대한적십자사를 일본 적십자사로부터 분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또 일본의 폭정과 간도(間島)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폭로, 규탄하였다.
4월 23일에는 시베리아에서 윤해에게 보낸 일본군의 압박에 대한 전보가 도착했다. 시베리아 한인회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1백만 명의 한인의 이름으로 작성된 전보였다. 일본이 소련에 한인 신문의 폐쇄와 한인 단체들의 해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파리 위원부는 이탈리아의 산 레모(San Remo)에서 개최 중인 평화회의 위원회에 시베리아에서 한국인들이 당하고 있는 일본군의 만행에서 한국인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해 줄 것과 한국의 독립 문제를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이같이 파리 위원부 활동의 대외적인 성과는 대단히 컸다. 1919~1920년에 프랑스 및 유럽의 여러 신문에 517건의 한국 관련 기사가 게재되었다. 프랑스 정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프랑스 상원과 하원의 외교 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대정부 질문을 통해 거론되었고, 영국 의회에서도 1919년 7월과 1920년 4월, 8월에 한국 문제가 논의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위원부에 한국인들의 독립을 염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이탈리아 하원 의원 스카노(Scano)는 <한국의 평화와 독립>이라는 위원부 발간 브로슈어를 읽고 위원부에 용기를 주는 서한을 보내 왔다.
하지만 파리 위원부의 마지막 요원으로 남아 있던 황기환이 1923년 4월 1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대유럽 외교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활동은 1923년 이후 극도로 약화되어 1940년대 말까지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프랑스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