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이재봉 칼럼니스트

 

 

5월 18일은 나에게 좀 괴로운 날이다.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거나 기여하지 못한 죄 때문이다. 이런 터에 도쿄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기념식 강연을 맡게 됐다. 공교롭게 일주일 전엔 민주화운동의 ‘대부’나 ‘큰별’로 불린 김근태 선생을 기리는 김근태민주주의학교의 강연요청을 받기도 했다.

 

도쿄의 5.18민주화운동기념식은 10여년 전 7-8명의 재일동포가 허름한 식당에서 비밀리에 시작했다는데, 올해엔 150명 안팎의 동포가 참석한 가운데 재일본한국YMCA 강당에서 열렸다. 다양한 한인단체 대표들과 정부측 총영사도 동참했으니 대단한 변화요 큰 발전이다.

 

강연 주제가 평화와 통일이었지만, 민주화에 저지른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어진 강연시간이 길지 않아 기념식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데다, 아직도 내 글과 강연에 날 과거 민주화운동의 鬪士(투사)로 오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 미리 보냈던 원고의 첫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 민주항쟁의 죄인에서 평화와 통일 운동가로 -

 

 

도쿄에서 열리는 5.18 광주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강연하게 된 게 참 죄스럽기도 하고 몹시 영광스럽기도 합니다. 먼저 일본에서까지 39년 전의 민주항쟁을 기념하시는 여러분께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민주항쟁 또는 민주화운동의 죄인입니다. 채만식이 1947년 펴낸 자전적 소설 ‘민족의 죄인’에서 따온 말입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해방을 두어 해 앞두고 일제의 압력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일본에 대한 협력을 권고하는 강연에 몇 번 나섰던 자신을 ‘민족의 죄인’이라 자처하며 告解聖事(고해성사)를 합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해방을 맞아 학생들이 친일파였던 교사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이는데, 반장이면서도 상급학교 입시준비를 핑계로 서둘러 귀가한 조카에게 데모 주동은 못할 망정 슬며시 빠져 나왔느냐며, 퇴학을 맞아도 좋고 입시에 떨어져도 좋으니 당장 학교로 돌아가 데모에 참여하라고 호통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1980년 5월 대학가에서 민주화시위 없이 하루해가 지지 않던 이른바 ‘서울의 봄’을 보내며 저는 단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해보지 않았습니다. 정치외교학과 2학년 대표를 맡았지만 데모를 주동하기는 커녕, 단순참가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요. 채만식의 조카처럼. 5월 광주항쟁은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반란”이고, 김대중은 “내란의 수괴 빨갱이”라는 뉴스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의식 없고 개념 없는 정치학도였습니다.

 

1983년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며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았습니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계기로 폭풍처럼 불어 닥친 한국의 반미주의에 관해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나아가 반미주의에 관해 박사논문까지 쓰고 1994년 귀국해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에서는 자식들과 조카들에게, 직장에서는 학생들에게, 민주화 시위에 동참하도록 부추기며 평화와 통일을 외쳐오고 있습니다. 채만식처럼.

 

20대에 진보적 생각을 갖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요 40대가 지나서도 그러한 기질을 지니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서양속담을 따른다면, 저는 가슴도 없고 머리도 없는 셈이니 그야 말로 새가슴에 골 빈 놈이지요. 지난날 민주화운동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 죄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앞으로 죽을 때까지 평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재봉.jpg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ljb

 

 

  • |
  1. 이재봉.jpg (File Size:26.5KB/Download:27)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pinterest kakao story band

  • 잡종의 생존법칙

      와인의 품질은 포도 품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성에 크게 지배된다. 결국 품종이 같다면 재배지가 다르더라도 품질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품종이라도 수세기 동안 어떤 곳에서 재배된 특정 품종은 자연 돌연변이에 의해...

  • 알아두면 쓸 데 있는 홍콩 잡학사전 file

    지난주에 날씨가 시원해서 좀 이상하다고 썼는데, 정말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덥고 습한 홍콩 본연의 날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이 날씨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태풍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그 외 다른 ...

    알아두면 쓸 데 있는 홍콩 잡학사전
  • 더 똑똑해졌다 –홍콩ID 새로운 스마트 카드 file

    홍콩내 거주하는 홍콩ID스마트카드 모든 소지자 교체대상 홍콩스마트아이디 카드가 지난 12월부터 전면 교체되어 지고 있다. 2019 년 12 월 27 일부터 새로운 스마트카드가 교체되어 지고 있다. 모든 스마트 홍콩 신분증 소지자는 기존 스마트 영주권 교체 센터에서 기...

    더 똑똑해졌다 –홍콩ID 새로운 스마트 카드
  • 죄인의 괴로운 날 file

      Newsroh=이재봉 칼럼니스트     5월 18일은 나에게 좀 괴로운 날이다.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거나 기여하지 못한 죄 때문이다. 이런 터에 도쿄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기념식 강연을 맡게 됐다. 공교롭게 일주일 전엔 민주화운동의 ‘대부’나 ‘큰별’로 불린 김근태 선생...

    죄인의 괴로운 날
  • 해외에서 뉴질랜드 부동산 구입

    뉴질랜드에서 바라 보는 해외 거주자들의 부동산 취득에 있어서 정부의 규제가 계속 진행중이다. 현재 부동산 경기 하락세의 이유이기도 한데 현정부의 부동산 안정화를 위한 외국인의 부동산 규제 정책은 효과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지만 경...

  • 나는 말랄라 file

    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그래, 아직 멀었다. 冥想(명상)을 백날 하면 뭐하나, 정신 못 차리는데. 프로페셔널의 자세와 실력을 갖춘 다음에 다음 단계로 가자. 날짜만 채웠다고 자격이 갖춰지는 게 아니다.   오전 7시 약속인데 9시가 넘어서 전화가 왔다. 12...

    나는 말랄라
  •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file

      Newsroh=황룡 칼럼니스트         有朋而自遠方來면 不亦樂乎 뜻을 같이하는 자가 멀리서라도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아내와 연애할 때 이후로 실로 오랫만에 설레는 기분이었습니다. 글로 만나다가 실제로 만나는 건 ...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 하루종일 뭘 했길래 집안 꼴이…

    어머니날에 생각해 보는 전업 주부의 노고     (로스앤젤레스=코리아위클리) 홍병식(내셔널유니버시티 교수) =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바쁜지 남자들은 충분히 알지못합니다. 전업주부들에게 가장 섭섭히게 들리는 남편의 말은 “하루 ...

    하루종일 뭘 했길래 집안 꼴이…
  • 중학교는 고등교육의 발판(1)

    [교육칼럼] 수업과 교사 전문화가 가장 두드러져 (워싱턴 디시=코리아위클리) 엔젤라 김(교육 칼럼니스트) = 중학교에 들어가면 초등학교와의 가장 큰 차이는 수업과 교사가 전문화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즉 과목마다 가르치는 선생님이 다 다르고 결국 매일 다섯 내지 ...

    중학교는 고등교육의 발판(1)
  • 사랑마운틴 쑥버무리~ file

        초등학교 3학년 읍내로 전학하기 전까진 할머니댁에서 성장하는 과정에 봄이면 친척 아주머니와 또래 아이들과 보리밭 경사로에 따스한 봄 햇볕을 받고 그 향기를 품고 있는 쑥과 냉이 등 나물을 캔다. 등과 머리위에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저만치 보이는 봄의 아지...

    사랑마운틴 쑥버무리~
  • 점점 더 늦게 결혼한다

      뉴질랜드 통계국(Statistics NZ)은 이달 초, 작년 한해 동안 국내에서 등록된 ‘결혼(marriages)’ 및 ‘이혼(divorces)’과 관련된 통계 자료들을 발표했다.    세계적으로 동성혼 합법화 등 사회적 관습이 크게 바뀌는 가운데 뉴질랜드에서도 결혼 및 이혼이라는 사회적...

  • ‘통일기러기’ 강연과 시국 논단 file

    어떤 페북 친구들의 만남     Newsroh=로창현 칼럼니스트           '마지(摩旨)'는 부처님께 올리는 밥을 의미합니다. 사시(巳時 오전 9시30분~11시) 기도 시간에 올리는데 이는 부처님 생전에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공양을 한데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가 상...

    ‘통일기러기’ 강연과 시국 논단
  • 여권을 잃었지만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file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 한바퀴 (17)     Newsroh=안정훈 칼럼니스트     방에 짐을 놔두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거리 구경을 하며 한블록 정도를 걸어서 올라갔다. 10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거리는 노점상들과 거지, 관광객과 호객꾼들로 북적댔다. 너무 멀리...

    여권을 잃었지만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 띠동갑 트럭커 지망생 file

      Newsroh=황길재 칼럼니스트     명당자리 잡았다. 밀레니엄 빌딩 입구 앞 밥테일 주차장에 자리가 났다. 내가 들어오는데 마침 누가 나갔다. 앗싸.   가이암과 마지막일지도 모를 배달을 마치고 돌아왔다. 갈 때는 전속력으로 올 때는 조금 천천히 달렸다. 요즘 초심으...

    띠동갑 트럭커 지망생
  • 모기지의 포로가 되고 있는 뉴질랜드인들

    은퇴 연령에 이르러도 갚아야 할 모기지가 있는 뉴질랜드인들이 늘고 있다. 내 집에 대한 빚 없이 은퇴를 맞이하려는 뉴질랜드인들의 꿈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은퇴 연령 이르러도 모기지 있는 인구 증가   오타고 대학 연구팀이 지난달 발표한 조사 결과...

  • 행복으로 가는 세번째 단계

    계속해서 앤서니 그란트 교수의 ‘행복한 호주 만들기’ 심리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설정한 행복으로 가는 첫번째 단계는 목표와 가치를 찾는 것이었고, 두번째 단계는 무작위로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세번째 단계는 ‘마음 챙김’(Mindful...

  • 북한이 최고 수준 미사일 발사 계속하는 이유

    [시류청론] 이스칸데르, 미국 압박용으로는 최적 수단? (마이애미=코리아위클리) 김현철 기자 = 북한이 5월 4일에 이어 5월 9일에도 연거푸 현장 사진까지 공개하면서 이동식 미사일 발사차대(TEL)에서 쏘는 신형 전술유도무기 이스칸데르(마하6.2~20)를 발사했다. 지난 ...

    북한이 최고 수준 미사일 발사 계속하는 이유
  • 서방언론의 베네수엘라 왜곡에 맞서다

    미국평화협의회가 말하는 베네수엘라의 진실     Newsroh=이래경 칼럼니스트     아래의 기사는 5월초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의 상황인 3월말 경 글로벌 리서치가 상세하게 보도한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미국이 자신의 안마당이라고 여기는 남미지역에 반미적 성격을 가...

  • 이동주 법정변호사(홍콩번호사)의 법률 칼럼 77주 - 브렉시트 (Br... file

             이동주 법정변호사 안녕하세요? 이동주 법정변호사 (홍콩변호사) 입니다. 지난주 필자는 브렉시트의 중심에는 두 정치인의 자존심 싸움이 있고, 그것이 곧 오늘날 브렉시트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전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 (David Camero...

    이동주 법정변호사(홍콩번호사)의 법률 칼럼 77주 - 브렉시트 (Brexit)와 홍콩: 통치하고 희생하기 위해 태어난 민족
  • 구석구석 여행 : 홍콩 스탠리마켓 file

    이번 여행지는 스탠리(홍콩의 작은 유럽)이다. 리펄스베이와 함께 홍콩 섬 남부의 2대 휴양지로 손꼽히는 스탠리는 드넓은 모래사장을 낀 해변을 따라 아름다운 레스토랑과 바들이 늘어서 있어 유럽의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한다. 또한 골목길 사이사이 수공예품, 골동품, ...

    구석구석 여행 : 홍콩 스탠리마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