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란 무엇인가?
Newsroh=노이경 칼럼니스트
2월의 학생상담실은 썰렁하다. 학년이 바뀌는 시기에 일부러 학교에 나와 상담을 새로 신청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꾸물꾸물 움츠린 날씨 탓에 추위가 더 느껴지던 어느 오후, 상담센터로 학생 한 명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보통 상담신청을 하면 당일은 신청서만 작성하고 상담일을 예약하는데, 그 학생은 그날 당장 상담을 받고싶어 한다고 했다. 하필이면 새로 편집하는 교재 때문에 마음조급하고 분주한 날이었다. 그래도 방학 중 일부러 찾아온 학생이라 일단 보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여학생이 들어왔다. 외양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리 응급으로 보이진 않았다. 학생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늘은 30분만 상담이 가능하다고... 노트북을 켜고 상담이 시작됐다.
“상담 받고 싶은 내용이 뭐지?”
학생이 작게 한숨을 쉰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종이를 좀 달라고 한다. 종이를 받아 책상위에 놓더니 뭔가를 끄적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 전부 다요, 저를 다 끄집어내서 얘기하고 싶어요. 수업시간엔 맨 앞자리 앉아서 수업 잘하고, 질문도 잘하고, 교수님들은 제가 그런 아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근데 그게 다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다.
“ ... 거짓말이란 게 무슨 얘기니?”
“ 지금 제 모습이 제가 아니라구요.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이 제가 아니거든요. ...겉으로 봐도 제가 비정상적인 게 많거든요. 근데 그런 안 좋은 환경에서 좋은 척을 하니까, 그렇게 살려고 하니까...”
종이를 받아 책상위에 놓더니 기호처럼 도형을 그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시작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초등학교시절 부모님의 이혼, 이후 엄마, 아빠 모두에게서 버림받아 집 없이 찜질방을 전전해야 했던 시간들, 남매는 갈라져 여기저기 맡겨지고, 맡겨진 친척집에서는 학교도 제대로 안보내주고... 또 다른 친척집으로 전전하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했던 시간들...잠시 아버지와 합쳐졌다 다시 헤어지고, 이번엔 또 엄마와 합쳐지고... 짐 보따리처럼 어른들의 편의대로 내돌려지며 살아야 했던 고단하고 서러운 삶이었다. 그녀의 고민은 그 열악하고 불쾌한 환경 속에서 괜찮은 척, 아무 문제없는 척 명랑하고 활달하게 자신을 꾸미고 위장하며 사느라 이제 진짜 자기모습이 뭔지 모르겠다고, 내가 누군지 알고싶다는 호소였다.
“제가 사람들에게 말한 건 다 거짓말이에요, 그래도 좋은 아빠, 엄마처럼 말했거든요.”
“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뭐 하러 남한테 미주알, 고주알 말을 해?”
“그런데 너무 밝게 말했거든요. 그렇게 꾸미고만 살다보니까 그게 진짜라고 착각했던 거 같아요.”
“.........................”
아이는 계속 눈물을 흘렸고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제가 지금 우는 이유는,,, 제가 교수님한테 제 밑바닥을 다 드러내는 거 같아서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요, 저보고 깨끗한 도화지 같대요, 전 더럽혀진 도화지 같은데...” 가슴이 아려왔다. 대화가 조금 더 지속되었다.
“.......상담을 통해 뭐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
“나를 다 훑어내고 싶어요. 나는 이런 행동을 했으니까 이런 사람이구나, 하며 스스로에 대해 알고 싶어요.”
결국 그녀가 상담실에 뛰어오게 된 이유는 최근 들어 함께 살게 된 엄마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엄마는 딸의 상처 나고 문드러진 세월에 대한 안쓰러움이나 미안함은 손톱만큼도 내비치지 않은 채, 자기합리화와 이기적 태도로 딸의 가슴에 수시로 화염병을 던지는 모양이었다. 딸과 엄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는 늘 밝고 강인한 척,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고 그러한 가면이 익숙해져 버려 지금은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아이의 반듯하고 싹싹한 태도였다. 울고 있으면서도 몸가짐이나 표정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별로 그늘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한 인간 고유의 건강하고 탄탄한 심리적 자원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마다 역경에 대한 적응수준과 대처방식(coping skill)은 다르니까...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으면 있는 그대로 적당히 드러내면 된다. 화도 내보고 한숨도 쉬고 통곡도 해보고...그게 오히려 건강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과 외면이 일치할 때 사람은 적어도 혼란을 겪지는 않는다. 문제는 불일치다. 사고와 행동의 불일치, 감정과 표현의 이중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어색함, 괴리감에도 불구하고 참 당차고 강인하게 자신을 포장했던 아이는 이제 지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뛰어난 사회성을 보였다. 역경에서 무너지지 않고 극복하는 자아의 능력을 탄력성(resilience)이라고 한다. 그녀가 고백하는 굴곡진 청소년기에 비해 매우 뛰어난 탄력성과 낙관성을 긍정적 자원으로 지녔다고 착각(?)할 만큼 그녀는 시종일관 밝은 말투로 상담자의 질문에 적절한 반응을 보였다. 탄력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긍정적 정서량이 많은 유전적 소인이거나 높은 지능, 주변에 건강한 지원체계 등이 있다는 지표일 수 있다. (학생은 중고등학교 시절 상담선생님들과의 좋은 만남이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어느덧 약속한 3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오늘 상담하며 어땠냐고 물었다.
상담 첫 시간에 내담자와 친밀한 관계형성을 기대한다는 건 환상이다. 그저 상담자에게 거부감이나 갖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게 언제나 일관된 내 생각이다. 학생은 초반의 경계와 탐색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듯 했다. 이전의 상담경험과 비교하며 선생님은 이전의 좋았던 상담자와 그저 그랬던 상담자의 딱 중간쯤이라는 말로 첫인상을 갈무리했다. 그러면서 잠시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수님,,,, 그 노트북이요.. 제가 신경썼을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었어요.”
“응?.........” 무슨 말인지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아! 내가 기록하는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구나. 상담내용을 적는다고 미리 네게 양해를 구할걸 그랬지? 하지만 이걸 누구한테 보여주지는 않아. 그런데 적지 않으면 무슨 말을 했는지 나중에 잊어버리니까 좀 적는 게 필요하거든. 네가 원한다면 보여줄 수 있어. 볼래?” 그녀 앞으로 노트북 화면을 돌려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음성으로 “아...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 “저는 상담내용 적으시는 건지 몰랐어요. 그런 거였어요?”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뭐? 무슨 얘기니?” 조금 멈칫대더니 대답을 한다. 그리고 그녀의 답변이 오늘 내가 이러한 글을 쓰게 만든 이유다.
“저는 교수님이 딴 일 하시는 줄 알았어요. 바쁘시다고 하길래... 제 얘기 들으시면서 교수님 일 보고 계신 줄 알았어요.”
내가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상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그것도 이삼 분이 아니라, 무려 45분 동안 줄곧 다른 일에 정신 팔려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서러웠던 시절과 아렸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고? 그게 가능했단 말인가?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시종일관 명랑한 듯(!) 앉아있던 내담자에 대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너무너무 미안했다. 그러한 오해가 있으리라고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나는 양해도 안 구하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녀는 앞에 있는 상담자가 지금 딴 짓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으면서도 한 시간 남짓 꾹 참고 자신의 속내를 열어 보이고 있던 거다. 얼마나 그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을까? 얼마나 자신이 초라했을까?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온마음을 다해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어야하는 사람의 심정을 상상해볼 수 있는가.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든 타인에 대한 기대와 예측이 자동적으로 작동된다. 그러한 기대가 과거경험과 일치하느냐, 낯선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정서반응과 행동표현이 유발되기 마련이다. 특히, 상담이나 진료 등 매우 사적으로 배려 받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집중해주고 온전히 머물러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한 순간에 자신이 받는 대우가 부적절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기를 든다. 만약 상담자가 상담시간 내내 다른 일에 반쯤 한 눈 팔고 있다고 여겨졌으면, 당연히 하던 말을 중단하거나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경청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불만을 표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내가 누릴 권리가 침해 받았음을 명확히 알려야 한다. 그런데 그 학생은 어떤 내색도 없이 그 불편함과 불쾌함을 견디고 있었던 거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감의 현주소였다.
그때 비로소 그녀의 유난히 상냥하고 싹싹한 음성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녀가 그날 들려준 불행한 청소년기를 돌아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귀찮은 짐짝 취급을 받으며 남의 집에 얹혀살기 위해, 그녀는 부당하고 치사하고 모멸스러운 갖가지 상황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자신을 앞에 두고 딴청 부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담자 앞에서 한마디의 항의도 불가했던 그녀가 나는 그렇게 이해되었다. 그래도 천만 다행스러운 건 마지막 순간에라도 슬쩍 던졌던 한마디였다. 선생님의 행위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대단히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그녀는 작은 조약돌이라도 내게 던져보았고, 그건 그녀가 지닌 자존감의 씨앗이었다.
내가 누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게 하는 것,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보다 적절한 시점에 항거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하여 내 자존이 살아있음을 자신과 만천하에 고하는 것, 그리고 남에게 눈치보고 맞추지 않아도 나는 가치있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수용하는 것, 이것이 앞으로 이 내담자와 이루어갈 상담목표일 것이다.
노이경 | 심리학박사(Ph D) 성심상담심리센터 소장, 가톨릭대 대학원 출강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이경의 사람과 사람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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