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11] 미 해병본부 경비 감독관이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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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도원 박사.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어느날 식당 감독관 일을 마치고 막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부대 본부에서 나를 급히 호출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불안했다. 혹 내가 식당 감독일을 소홀히 한 것이 있거나 한국인 식당 직원이 무슨 말썽이라도 피워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통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근목피로 버티었던 시절인지라 대부분의 한국인 직원들은 일이 끝나면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눈치껏 가져가곤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사용하지 않은 시레이션이나 깡통 식품 등을 슬쩍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감독관이 된 후로 이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남은 음식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된다고 공표했으나 절대 오픈하지 않은 음식들을 가져가서는 안된다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나 스스로는 일체의 음식을 들고 나가지 않았다. 나 부터라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미군들의 눈밖에 나서 어렵사리 얻은 일자리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로 직원들은 내가 정한 규율을 잘 따라 주었다.

감독관 일로는 트집을 잡힐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혹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휴가 나온 친구들이 너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미군 식품을 선물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그 당시 식당 총책임자인 상사에게 “한국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들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그들을 좀 도와 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쾌히 “좋다”고 했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니 그가 “준비가 다 됐다”며 식당 뒷문을 열고 나가기에 따라 나서 보니 놀라운 광경이 기다라고 있었다. 군용 쓰리쿼터에 식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는 싱글거리며 “부족하냐?”고 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반신반의 하는 나를 보던 그는 “여기서는 내가 대장이니 걱정말라!”며 내 등을 토닥거려 주고는 빨리 차에 타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는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자네, 억세게 운 좋은 친구야!”

나는 본부 비서실에 가기 전에 식당 주임 상사의 사무실에 먼저 들러 도대체 무슨 일로 본부에서 나를 찾는지 탐색해 보기로 했다. 그라면 어느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가 ‘무사’한 모습을 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막 서류 정리를 하고 있던 그가 어느때보다도 활짝 웃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한, 자네 억세게 운 좋은 친구야. 부대장이 자네를 특수직에 임명하기로 했다는데, 빨리 해병본부 사무실로 가보라구! 나중에 사케 한잔 사는 거 잊지 말고?”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6개월 정도의 식당 감독관 일이란 것이 그동안의 고생에 비하면 그저 누워서 떡먹기에 불과한 일이었는데, ‘억세게 운좋은’ 특수직으로 간다니.

본부 사무실을 찾아 들어가자 몇몇 장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긴장된 얼굴을 하고 찾아간 나를 반갑게 맞이하더니 “세컨드 레프터넌트 한! 축하하네!”라며 일제히 악수를 청했다. 분명 “세컨드 레프터넌트 한”이라고 했다. 한국군으로 말하면 ‘소위’였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가 소위 계급장이 부착된 옷과 워커 등을 내밀었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45구경 권총이 내 손에 쥐어졌을 때였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내게 비서실장인 듯한 장교가 앞으로 다가서더니 뭘 그리 놀라고 있느냐 듯 “내일부터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하니 그만 가보라!”며 다시 악수를 청했다.

도대체 이런 ‘벼락출세’라니! 믿겨 지지가 않았다. 바로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갈 곳이 없어서 서울 친구집에 숨어들었고, 지하 땅굴에서 몸을 숨겼던 처지의 ‘낭인’에 불과했던 내가 비록 임시 특수직이긴 했으나 미국 해병 육군 소위가 된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당시는 전시였고, 모든 것이 ‘편법’과 ‘긴급’으로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식당을 드나들던 해병장교들과 친분이 생기고 그들 눈에 좋게 비쳤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널뛰기식 ‘반전’이어서 그날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교 숙소의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당시 일반 한국인들은 꿈에나 그릴 만한 미군 장교식당의 먹거리에 이제 권총을 차고 미군복을 입고 짚차를 타고 거리를 달릴 생각을 하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어렷을 적 읽었던 동화나 문학전집에서나 등장할 법한 백마 탄 왕자가 따로 없었다.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되어 군밤 장사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날 을지로 육정목 인근의 전철역 앞에서 벙어리 모자를 눌러 쓴 채 군밤을 굽다가 막 전철에서 내리는 하얀 칼라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마주쳤다. 막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고향 동네에서 오며가며 야릇한 감정으로 보았던 여학생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벌떡 일어나서는 “나 한도원인데, 모르겠냐?”고 했더니, 흠칫 놀래며 모르는 척 하고는 횅하니 달아나 버렸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얼굴이 후끈 거렸지만, 그 여학생을 다시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입은 상처를 그 여학생이 감히 짐작이나 할까 싶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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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해병 소위 계급장을 달고 친구와 함께 (오른쪽이 한도원) ⓒ 한도원
 
짚차 타고 권총 차고… 전선을 누비다

비록 부모형제와 멀리 떨어져 있고 여전히 가진 것이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제 나는 어엿한 미군 소위가 되었고 월급도 식당 감독관 자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임관이 된 다음날, 장교 복장에 권총 차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부대에 나타나자 평소 나를 알고 지내던 미군 사병들이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이며 악수를 처하는 바람에 멋적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나이가 든 식당 주임 상사도 거수경례를 하여 몸둘 바를 모르게 했다.

내가 맡은 일은 부대 외곽을 순찰하는 50여 명의 순찰대원들을 지휘 감독하는 일이었다. 순찰 업무란 부대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서 미군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행상들을 일정한 거리 밖으로 내쫓는 일이었고, 종종 무슨 무슨 행세를 하며 부대로 진입해 들어 오려는 업자들을 검문 검색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절 먹고 살겠다고 덤비는 어머니 아버지 뻘 되는 사람들을 마냥 매몰차게 다룰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난처한 지경이 처하기도 했으나 무난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애썼다.

식당 감독에 비해 경비 감독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으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종종 마산 시내에 놀라 나갔다가 사고를 치고 오는 미군들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언젠가 미군 동료가 시내 유흥가에 나갔다가 시계와 금품이 든 지갑을 몽땅 잃어버렸다며 나에게 함께 찾으러 가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를 따라 나서서 한참을 가다보니 외진 곳의 건물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기 저기서 짙은 화장을 한 한국 처녀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랬다.

말로만 듣던 사창가였다. 겉에서 보기에는 창고였으나 안에는 여러개의 칸들이 있었고 줄잡아 20여 명의 여자들이 기거하며 미군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얼굴이 화끈거렸고 민족적 자존심이 구겨지는 듯하여 당장이라도 뛰쳐 나오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전쟁통에 그런 일들로 호구지책을 삼아야만 하는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당시 댄스홀이나 사창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자들 가운데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학생들도 있다는 걸 알고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도 나는 걸핏하면 불려나가 미군들의 사고 뒷처리를 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게 또다른 임무가 떨어졌다. 마산 본부대를 떠나 전투식량 보급을 위해 동원된 수 백 명의 한국인 노역자들을 감독하고 지휘하는 일이었다. 한국인 노역자들이 하는 일이란, 배낭이나 지게를 이용해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하는 병사들에게 나르는 일이었다. 나는 주로 짚차를 타고 다녔으나, 19세 어린 청년이 나이든 노역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선으로 이들을 안전하게 안내하고 예정된 시간에 짐을 풀어 놓게 하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어떤 때는 가는 도중에 포탄이나 총알이 날아오는 바람에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바람에 식량을 제때에 공급하지 못해 큰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혹이라도 노동자들을 인솔하고 가다가 내가 탄 짚차가 적에게 노출이 되어 집중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보급 노동자 감독관을 한 4~5개월 가량 했던 어느날이었다. 군대 업무차 헬기를 타고 부산을 가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광복동 거리를 활보하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군 해병 군복을 입을 나를 본 친구들은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어린애 처럼 보이며 괜히 으쓱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숨겨진 표정 속에는 왠지 느긋함과 여유가 묻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그들은 영도에 전시학교가 세워져 6개월 정도만 공부하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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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교식당 감독관으로 일하던 나는 미 해병본부로 부터 경비감독관으로 임명되어 한국인 노역자들을 인솔하고 전투지에 식량을 배급하는 일을 맡았다. 사진은 유엔군에 차출된 바지저고리를 입은 마을주민들이 지게에다 C 레이션(전투비상식량) 상자를 지고 인솔자를 따라 전투현장인 산으로 운송하고 있다. ⓒNARA, 눈빛 출판사
 
다시 책을 손에 잡다… 6개월만에 고등학교 졸업

나는 그들이 “6개월만 공부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학업이 그때서야 떠올랐다. 전쟁통에 살아 남기에 급급했고, 우연한 기회에 미군 식당 감독관이 되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활보하다 보니 내가 북한을 탈출할 때 가졌던 목표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전시학교가 열리고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땀을 흘리며 미래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평북 후창을 떠나 올 때, ‘서울에서 가서 일류 학교에 다니며 보란 듯이 모범생이 되어 돌아오겠다’며 어머니를 설득했던 내가 아니던가.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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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당시 전시 학생증. ⓒ 위키피디아ⓒNARA, 눈빛 출판사
 
나는 부산에서 서둘러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즉시 내 직속 상관을 만나 더 이상은 군대생활을 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상관은 내 말을 다 듣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네 결정을 존중한다, 행운을 빈다”며 격려까지 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신뢰하고 중요한 직책을 맡겨준 미군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근심어린 얼굴을 생각하며 미련을 떨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즉시 전시학교에 등록했다. 1년 이상 책을 손에서 놓은 터라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특유의 끈기와집중력을 발휘하여 학교와 도서관을 왕래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학교에 다시 다니면서 알게된 사실은, 경복고등학교에 함께 입학하여 공부한 300명의 급우들 가운데 약 3분의 2가 전쟁통에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복학을 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한없이 기쁘기는 했지만, 많은 친구들을 잃은 슬픔도 그와 비래하여 매우 컸다.

나는 다행히 6개월만에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다른 고비가 나의 앞길을 막아서는 악순환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에도 올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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