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으며
Newsroh=이재봉 칼럼니스트
2019년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게 되어 몹시 영광스럽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저를 수상자 후보로 추천해주신 분과 수상자로 결정해주신 심사위원들 그리고 정세현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누리집에 들어가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알았습니다. 첫째, 추천 대상을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에 기여한 공로가 큰 개인이나 단체’로 정해놓고 ‘역사 속의 인물’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돌아가신 분들도 대상이란 거죠. 1999년 제1회 수상자가 고 윤이상 선생이었더군요. 2002년 제4회 수상자가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었고요. 제가 재단으로부터 통보받은 때가 6월 중순 이희호 여사의 장례기간 중이었습니다. 올해 한겨레통일문화상 추천과 심사기간이 좀 늦추어졌다면 그분께서 수상자로 선정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봤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기실 정도로 평화통일에 헌신해오신 분이니까요. 그분 몫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둘째, 2년 전 2017년엔 수상자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주는 상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영광과 함께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낍니다.
평화학자 또는 통일운동가로서 죽을 때까지 평화와 통일에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각오는 20여년 전부터 글과 강연을 통해 밝혀왔습니다. 1980년대 초 서울 대학가에서 민주화 시위 없이 하루해가 지지 않을 때 정치외교학과 학생대표를 맡고서도 데모 한 번 참여해보지 못한 죄를 씻기 위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의 죄인’으로 통일운동가의 길을 걸어온 터에 이렇게 크고 영광스러운 상까지 받게 됐으니, 내년에 정년을 맞아 교수직은 법에 따라 멈추더라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일은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계획이나 예정에 없던 길을 많이 걸었습니다. 상고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에 뒤늦게 대학생이 되고 교수가 됐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10년 다니는 동안 북한이나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도 적었고 공부도 하지 않았지만, 1994년 여름 귀국하자마자 시간강사로 맡게 된 과목 가운데 하나가 <북한사회의 이해>였습니다. 그 해 김일성이 죽자 곧 통일될 거라며 그 과목 수강생이 늘고 분반이 되어 제가 얼떨결에 떠맡게 된 거죠. 북한 공부의 시작이었습니다.
1996년 봄부터 원광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무렵 북한 식량난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식량지원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통일한국≫이라는 월간지에서 원고청탁을 해왔습니다. 대북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굶어죽는다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내줘야지 왜 반대하느냐고 했더니 그럼 찬성하는 글을 써달라더군요. 나중에 잡지를 받아보니 식량지원에 대해 저는 지지하고 통일부 간부는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 글을 읽은 <전북종교인협의회> 대표의 부탁으로 전북지역 13개 시.군을 돌며 강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2년 동안 약 5억원을 모아 북한에 식량을 보냈고, 이를 계기로 1998년 전라북도와 함경남도 자매결연을 추진해보겠다며 일주일간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2-3쪽의 잡문 한 편이 인생 항로를 바꾸기 시작한 거죠.
1999년 6월 제1차 서해교전이 일어났습니다. 북한 배가 서해 북방한계선 (NLL)을 넘어오자 남한 배에서 대포를 쏘아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환호와 축제 분위기 속에서 해군은 주요 일간지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실어 국민을 상대로 “민과 군이 함께 애창할 수 있는 승전가”를 현상 공모했습니다. 저는 전쟁 분위기에 미쳐가는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을 구상했습니다. 만에 하나 교전이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면 남쪽이나 북쪽이나 불바다가 되고 잿더미로 변하면서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으로, 북녘 실상을 바로 알리고 양쪽의 적개심을 줄여 전쟁 가능성을 단 1%라도 낮추겠다는 취지였습니다. 8월부터 매달 <남이랑북이랑>이라는 제목의 8쪽 유인물을 만들어 주변에 뿌렸습니다. 글을 읽고 동감하면 구독료 삼아 북한 돕기 성금으로 1천원씩 내달라는 호소를 곁들이면서요. 매달 1천원 내기 귀찮으면 1년치 1만원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돈 많은 한 사람이 1억원 내는 것보다 만 명이 만원씩 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지만, 평생회비 명목으로 10만원씩 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결국 2008년까지 10년 동안 1억원을 모았습니다. <남북어린이 어깨동무>, <겨레하나>, <민족화해운동연합>, <남북평화재단>, <우리민족 서로돕기>, <신은미 재단> 등을 통해 식량지원이나 수해복구, 평양 학용품공장 건립이나 개성 평화의 숲 가꾸기 등에 쓰였습니다.
이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더 큰 걸음을 내딛고 싶습니다. 마침 작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대전환 시대가 열렸습니다. 첫째, 1945년부터 지속된 73년짜리 분단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1948년부터 유지된 70년짜리 북미 적대관계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1953년부터 어정쩡하게 지켜져온 65년짜리 정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넷째, 1993년부터 불거진 25년짜리 ‘북핵문제’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인 미국의 패권정책이 변하고 있습니다. 워싱턴정치의 이단자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서 말입니다. 저는 그가 2016년 대선 후보일 때부터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클린턴 후보보다 낫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미국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0번 넘게 전쟁을 벌여왔는데, 그는 성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을 일삼더라도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개죽음 당할 수 있는 전쟁은 단 한 번이라도 덜 치르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2017-18년 김정은과 트럼프가 ‘핵단추’를 주고받으면서까지 갈등을 고조시킬 때 많은 분들이 전쟁을 우려했지만, 저는 둘의 협상전략이라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트럼프는 미치지도 않았고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미치광이 이론 (madman theory)’을 구사하며 미친놈처럼 보일 뿐이다. 교활한 협상가요 유능한 장사꾼이다”는 설명을 곁들이면서요. 지난 2월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미국에서 지켜보면서 역시 협상가다운 트럼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고 내년 재선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노벨상 심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8월 이전에 트럼프가 한국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상을 받고, 내년엔 한반도 비핵화 및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에 이용하는 승부수를 띄우리라고 예상해왔습니다. 이 상을 얼마나 원하면 채신없이 아베 일본총리에게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겠습니까. 주한미군 철수는 그의 2016년 대선공약입니다. 우리는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미(知美)를 바탕으로 친미(親美)나 반미(反美)를 넘어 용미(用美)하자는 뜻입니다. 우선 평화협정 체결을 제 평화통일운동의 당면 목표로 삼고 나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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