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김희국 형제(한국 새길교회)
‘순교자’ 김은국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누가복음 6:36
한국전쟁 발발 초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을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을 하면서 1950년 10월 유엔군은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서울에서 대학 강사로 있던 이대위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되어 평양근무를 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전쟁 발발 1주일 전에 공산군에게 끌려간 12명의 목사가 잔혹하게 살해되고 두 명의 목사만이 살아 돌아온 사건이 있었는데 이대위의 상관인 장대령이 상부의 지시를 받아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됩니다. 살아 돌아온 두 명의 목사 중 젊은 ‘한목사’는 공산군의 취조과정에서 정신이상이 생겨 풀려났으므로 나머지 한 명, ‘신목사’만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조사의 책임을 맡은 장대령은 진실을 알면서도 조사의 방향을 미리 정하고 진실을 덮으려고 합니다. 희생된 12명의 목사들을 순교자로 만들어 공산당의 잔혹성을 강조함으로써 사건을 반공선전에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대령은 신목사가 그들의 의도대로 증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목사는 침묵합니다. 한편 이대위는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장대령의 의도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합니다. 이대위는 신목사를 만나 대화중에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신목사는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계속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얼마 후 장대령은 평양의 몇몇 목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방첩대에 잡힌 북한군의 소좌를 불러냅니다. 그는 목사들을 취조하고 총살시킨 당사자입니다. 장대령은 북한군 소좌에게 희생된 목사들이 신앙을 지키면서 순교한 훌륭한 성직자들이었다고 말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소좌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폭로합니다. 12명의 목사들 모두는 비겁하게 생명을 구걸하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 대한 거짓 고발을 일삼았고, 자신이 보기에 비루한 시정잡배에 불과한 버러지 같았기 때문에 자신이 총을 쏘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목사만은 용기 있게 대항하고 의연히 대처하였으므로 죽이지 않았다고 당시의 진실을 밝힙니다. 장대령과 이 자리에 함께 했던 목사들은 이 사실이 교우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입을 다물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합니다.
신목사 또한 그후로도 일체 함구하며 조용히 지냅니다. 그러나 12명의 목사들의 순교에 대한 소문과 억측이 비등해지고, 평양의 신도들은 신목사의 집에 찾아와 욕설을 하며 시위를 합니다. 신목사는 괴로워하다가 결국 침묵을 깨고 진실과는 정반대의 증언을 합니다.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목사들을 팔아넘겼으며, 그런 그를 다른 목사들이 순교당하는 순간에서도 용서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후 신목사는 평양시내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거짓 고백과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신의 뜻에 더욱 순종하며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에 시달리고 전쟁의 절망상황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신의 영광을 증명할 순교자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거짓을 내어주게 됩니다. 그러자 진실을 알고 있던 평양의 기독교 목사들은 신목사의 용기에 고마워하는 한편, 진실을 알지 못하는 열혈신도들은 신목사를 배반자 ‘유다’라고 비난하며 폭력을 행사합니다.
신목사가 감내해야 했던 것은 배반자라는 누명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진정으로 괴롭힌 것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겨울이 되면서 중공군이 대거 남침해 오면서 국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대위는 신목사에게 함께 남한으로 피난 갈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신목사는 교인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면서 이대위에게 속에 감추었던 고뇌를 고백합니다.
“나는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그리고 이대위에게 간청합니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그들에게는 희망이라는 환상이 필요합니다. 우린 절망을 때려 부수어 절망이 우리를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절망은 자신의 십자가이므로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목사는 신앙을 마지막 생명줄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사로서의 지위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환상일지라도 희망이 없이는,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신목사는 말합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목사로서의 죄책감과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신의 침묵, 그리고 깊은 신앙적 회의를 감내하며, 그는 목사로서 또한 심한 기침으로 각혈을 하는 병든 허약한 몸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평양에 남습니다.
▲ 영화 '침묵'의 한 장면. |
‘침묵 Silence’ 엔도 슈사쿠
카톨릭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의 일본이 배경입니다. 포르투칼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했던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종교를 배반하였다(배교)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세 명의 젊은 신부가 페레이라를 찾아 일본으로 향합니다. 도중에 한 명은 병에 걸려 마카오에 남고 로드리고와 가르페 두 신부는 다행히 카톨릭 신도부락에 당도하여 은신처를 제공받고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포교의 낌새를 눈치 챈 관리들이 마을을 덮치고 부락민 세 명이 잡혀가서 그 중 한 명은 성모마리아 성화를 밟고 침을 뱉는 배교를 하고서 풀려나고, 두 명은 마을로 다시 호송되어 너무도 잔혹하게 처형당합니다. 거대한 십자가에 사람들을 매달고, 그 십자가를 바다에 세워놓습니다. 거센 물살에 살이 쓸리고 얼굴 위로 차오르는 밀물이 숨통을 막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그들은 시체가 되어 땅 위에 놓입니다.
두 신부는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선교를 이어가기 위해 서로 흩어져 다니기로 합니다. 도피 중에 신부는 지방 영주의 학정에 찌들린 가련한 신도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냉담한 침묵에 낙담하면서 신앙에 대한 회의로 마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로드리고 신부는 관료들에게 잡혀 나가사키에 호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고, 얼마 후 헤어졌던 가르페 신부도 관리들에게 잡혀 오다가 함께 잡힌 신도들이 도롱이 벌레처럼 거적에 감겨 바닷물에 수장당하는 과정에서 익사하게 됩니다. 로드리고는 이 광경 모두를 관리의 감시 하에 멀리서 목격합니다.
다시 감옥에 갇힌 로드리고는 하느님의 무서운 침묵에 대해 몸서리치면서 다시금 회의에 빠집니다. ‘주님께서 고통 속에서 죽어가던 그들의 비명도 들으셨을까? 하느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횡단하여 이 머나먼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로드리고는 이전에 여러 신부들을 배교시킨 관리 이노우에로부터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관리 이노우에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부드러운 심문을 하게 되고 로드리고는 뜻밖의 환대에 내심 놀랍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의 스승이었던 배교한 페레이라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로드리고에게 배교하라고 설득합니다. “일본은 밑이 없는 늪지대이다. 모든 묘목은 거기서 뿌리가 썩어 말라가는데 그리스도교라는 묘목도 이 늪지대에서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말라갔다.”
얼마 후에 로드리고는 결국 배교의 실체를 만납니다. 감방에 갇힌 채 아무런 고문을 받지 않고 며칠을 지내던 어느 날, 밤이 되자 감방 바로 밖에서 누군가 심하게 코를 고는 것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사실 이 소리는 코를 고는 소리가 아니라 ‘구멍 매달기’ 고문을 당하는 일본인 신도들의 신음이었습니다. ‘구멍 매달기’는 악취 나는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물을 붓는 고문입니다. 불쌍한 신도들은 이미 배교하고 성화를 밟은 신도들입니다. 그러나 신부가 배교하지 않으므로 계속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로드리고는 진실을 알고 나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때 페레이라 신부가 찾아와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합니다. 그 또한 바로 그 감방에 갇혀서 신도들의 고문당하는 신음을 들었는데, 자신이 배교한다면 신도들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결국 굴복했다며 로드리고에게 말합니다. ‘신음하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침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들에게 고통을 줄 권리가 그대에게 있는가? 그 고통은 신이 아니라 자네만 끝낼 수 있네. 그리스도일지라도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죽어가는 신도들을 위해 배교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고뇌합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는 하느님의 침묵에 다시금 절망합니다. 배교란 약속받은 하느님의 세계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바다에서 처참하게 처형되었던 부락민들과 지금 바로 옆에서 구멍매달기 고문을 당하는 저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뜻이 종교에 대한 신념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을 위해 그 신념마저 포기할 수 있는 용기인가.
결국,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밟혀 거의 닳아 오그라진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를 밟습니다. 우묵하게 들어간 주님의 얼굴은 괴로운 듯이 신부를 바라보고 호소합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신부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괴로워합니다.
이상 두 권의 소설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궁극적인 ‘신’의 존재를 회의하면서 주어진 삶을 감내하는 신목사와 신의 침묵에 절망하면서 배교하는 로드리고신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신앙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요?
신목사가 뭇 신도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게 생명을 구걸하고 서로 비난하다가 인민군 소좌에게 죽임을 당한 12명의 목사들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자신이 오히려 다른 목사들을 팔아넘긴 사람이라고 거짓 고백을 한 이유는 전쟁으로 삶의 벼랑 끝에 몰린 불쌍한 교인들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로드리고신부도 “그리스도일지라도 죽어가는 신도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배교했을 것이다.”고 한 페레이라 신부의 고백을 듣고 자신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이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신도들을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배교를 결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목사, 로드리고 신부 모두 혹독한 상황 속에서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무서우리만치 냉담한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서는 풀 수 없는 신앙적 회의로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겪는 극심한 고통에 찬 호소에도 불구하고 침묵만 하실까요?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을까요?
스스로 ‘어둠의 성녀’라고 부른 ‘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부님, 끔찍한 상실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둠과 외로움,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어둠이 너무나 깊어서 제 마음으로도, 이성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영혼 안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제 안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저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제 마음이 ‘저의 주님’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마더 테레사의 절절한 고백입니다. 만일 마더 테레사가 내적 어둠을 겪지 않았다면, 사랑받지 못하는 자의 고통과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알지 못하고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그토록 동일시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가난한 이들의 깊은 신뢰와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확신이다. 회의하지 않는 확신에 찬 신앙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나침반의 바늘이 정지해 있다면 그 나침반은 더 이상 북극을 가리키지 못하는 고장난 것입니다. 항상 북극점을 향해 떨리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회의하는 가운데 떨며, 하나님의 침묵에 괴로워하는 신앙이 오히려 확신에 차서 더 이상 회의하지 않는 신앙보다 더 건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온갖 재난과 불운한 사고 등으로 우리의 가깝고 먼 이웃들이 견디기 힘든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하느님의 응답은 아예 없거나 참으로 더디기만 합니다. 무서우리만치 냉담한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괴로워하며 회의하는 신앙의 자세는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과 연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읽으신 성서말씀 누가복음 6장 36절의 영어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 compassionate, just as your Father is compassionate.” 이 영문 말씀처럼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함께 아파하시는 것 같이, 여러분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읽을 때 본뜻을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번 새길 신앙고백에서 고백하듯이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하면서 곁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함께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빈민과 노숙자를 위한 자립공동체 ‘엠마우스’를 만들어 구호활동을 하면서 빈민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던 프랑스의 ‘아베 삐에르’ 신부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질적으로 인류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비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투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후자의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그들과 더불어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투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대부분의 개신교 목회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열심신자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내세우며 개인의 영혼구원과 기복신앙을 신념화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십일조와 교회와 교단의 위세확장 추구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종교집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회의 불평등과 불의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고 정의와 평등,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을 ‘종북좌파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경험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로 낙인이 찍힌 자들은 바로 ‘골’로 보내야 하는 존재, 즉 죽여 없애야 하는 자들을 뜻하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비틀어 가짜를 날조하는 몰지각한 정치인들이 서로 앞 다투어 막말을 쏟아내고 있고, 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막가파 언론과 개신교 대형교회의 수구적인 목회자와 신자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보수라고 칭하는 자들은 남북분단의 구조 아래서 ‘친일’로부터 대물림 된 ‘반공’이라는 칼날 하나로 지금껏 엄청난 기득권을 누려왔습니다. 그 부당한 기득권을 내놓지 않겠다고 부패한 수구세력들이 각계 각 부문 에서 소위 ‘보수’라는 입간판을 내걸고 결사 항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기독교단체의 대표라는 어느 목사가 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헌법정신을 깡그리 무시하는 내란선동에 준하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을 신앙 양심이나 보편적인 진리보다 앞세우고 기득권을 놓기 싫어하는 자들의 행태가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나와 남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자신의 가족이나 동류집단에 속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야하는 불신자들이며, 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웃과 공동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끼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아가겠다는 이기적이고 천박한 인식에 다름 아닙니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이 없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결국 현찰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보잘 것 없는 사회적 약자들, 당신 자신처럼 상처받은 자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하며, 그들을 당신과 동일시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다른 종교가 아닌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청년 예수가 늘 함께 하며 자신과 동일시한 사람들, 오늘날의 가난한 이웃,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무의탁 노인,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5.18과 4.16 유가족 그리고 북한 동포 등 상처받고 곤경에 처해 있는 이웃이 바로 예수이며, 그들을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의 삶에는 그 이웃의 아픔이 얼마나 들어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연대의 마음, 낯선 이웃까지도 보듬어 안는 환대의 자세,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비판 정신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민감한 영성을 갖출 때, 우리는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새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저와 교우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