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고찰을 통해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편집자 주] “과거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하고, 근대사 이후 언론은 승자와 패자를 두루 보듬는 ‘객관적 역사’의 초석을 다져왔다.
그렇다면 호주 언론에 처음 드러난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호주 언론이 호주인들에게 소개한 한국의 첫 모습은 어땠을까?
또한 호주언론에 처음 소개된 한국인은 누구이고 그는 어떤 역사의 흔적을 호주에 남겼을까? 그리고 그 역사의 흔적은 호주한인동포 및 고국 사회에 어떤 교훈을 던져줄까?
호주한인사회의 최고의 역사를 지닌 대표적 한글매체 <톱뉴스>는 광복 74주년을 맞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특집 기획 ‘호주 언론에 처음 드러난 한국’을 2부에 걸쳐 게재한다.
제1부에서는 호주 언론이 보도한 한국의 첫 모습을 그리고 제2부에서는 호주 언론에 등장한 최초의 한국인을 소개한다.
사진: The telegraph 1910년 8월 27일 표지 이미지
“한국, 8월 29일 일본에 공식 합방…”
<더 텔레그라프, 1910년 8월 27일>
호주 국내적으로 최대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있는 데일리 텔레그라프(당시 더 텔레그라프)는 ‘경술국치일’ 이틀 전인 1910년 8월 27일 자 신문을 통해 “8월 29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한국을 합병한다”고 보도했다.
우리 민족의 치욕과 슬픔의 ‘경술국치일’을 앞두고 텔레그라프 지는 당일 신문의 12면 전면을 할애해 한국의 상황을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도했다.
이 신문에 게재된 화보기사는 같은 해 9월 2일 더 위크(The Week, 1876-1934)에 ‘일본에 합병된 한국…일부 한국인들의 모습’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전재됐다.
이 신문은 의친왕으로 추정되는 사진에 ‘한국의 황태자와 부인들’(Korean Prince and his wives)이라는 사진설명(캡션)을 달았다.
의친왕의 부인들이라고 소개된 사진 속의 여성들이 다리를 포갠 채 사진 촬영에 응한 모습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또한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 짐을 나르는 한국인 지게꾼, 가마를 탄 고위 양반과 수행원들, 그리고 부유층 가정의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 등을 게재했다.
아울러, 개울가의 빨래터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는 아낙네와 다듬잇돌을 가운데 두고 다듬이질을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구체적 확인은 어렵지만, 1910년 8월 28일 자 더 텔레그라프 지에 보도된 이 화보 기사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이 호주인들에게 언론을 통해 상세히 소개된 최초의 사례로 믿어진다.
물론 이에 앞서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한국에 대한 호주 언론의 보도는 이어졌지만 대부분 단신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다수의 사진이 포함된 전면 기사는 매우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 이 보도는 독립을 향한 우리 선조들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체계적인 항쟁을 호주와 뉴질랜드의 구석구석에 알리는 전주곡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사진: 1910년 9월 2일자 The Week
호주언론이 바라본 한국의 지형적 위치
이 신문은 한반도를 소개하면서 “한국은 ‘황해’와 ‘일본해’ 사이에 위치한 8만 평방 마일에 불과한 자그마한 나라지만 온갖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서 ‘격동의 한반도’ 상황을 시사했다.
더 텔레그라프는 “1895년까지 중국이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보유하고 있었다”면서 “청일전쟁이 끝나고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지만, 그 시점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과 점령이 본격화된다”는 정황을 상세히 기술했다.
이 신문은 특히 20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면 한반도 주변에서 펼쳐진 열강들의 치열한 이권다툼을 자세히 다뤘다.
즉,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 그리고 훗날 3.1운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 실패의 원인이 된 영일동맹 체결의 막후 상황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 1894년 10월 20일자 The Wellington Times
대한제국의 황제와 왕 그리고 한국사회
더 텔레그라프는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조선 27대 왕) 순종의 이름은 이척이며 1874년 3월 생으로, 아버지 고종으로부터 왕권을 계승했다는 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특히 이 신문은 고종 슬하에 4명의 왕(편집자: 실제는 3명 – 완친왕(이선), 의친왕(이강), 영친왕(이은))을 뒀지만 이들은 모두 황제에 등극하지 못했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한편 이 신문은 당시 한국의 인구는 1000만 명 가량인데, 일본인도 110만 명 가량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언어적 배경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한국인들은 한자와 함께 알파벳 체계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종교적인 면도 소개됐다. 조상숭배 종교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기독인이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수 많은 학교들이 영어, 일본어, 불어, 중국어,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되고 있으며, 기술학교도 크게 늘어나고 있고, 서울 인근 지역에는 농업학교가 설립돼 현대식 농업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도 전했다.
특히 한국은 전형적인 농업국가이지만 농사 방식은 매우 낙후된 전근대적이며 통신, 교통시설도 매우 낙후돼 있으며 전체 철도 연장이 불과 800마일(1,288km)에 불과한데 이 역시 일본 정부의 소유라고 설명했다.
이 신문은 또 “서울에서는 현재 4개의 일간지가 발간되고 있고, 제물포에는 다수의 일본어 신문이 있다”고 덧붙였다.
19세기 후반 시작된 한국 관련 보도
호주 언론 매체들이 호주사회에 한국을 처음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본지 특별취재팀이 지난 2개월 여 넘게 조사한 결과 호주 내의 한국 관련 최초의 보도는 아이러니하게도 호주 최초의 소수민족 언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38년부터 남부호주 아들레이드에 대거 정착하기 시작한 소위 ‘독일제국’으로 불린 프로이센 출신 이민자들을 위해 창간된 독일 교민신문이 그 ‘주인공’이다.
대표적인 예가 1886년 독일어판 ‘호주 신문’(Australische Zeitung, 1875-1916)이다. 이 신문은 폐간할 때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호주 주류 매체보다 앞서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단신으로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독일제국’으로 불린 프로이센 출신 이민자들은 1838년부터 남부호주 아들레이드에 대거 정착했다.
남부호주 포도밭을 장악한 이들의 이민은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됐고, 2차 대전후 유럽 이민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독일인들은 남부호주주와 퀸슬랜드 주에서 영국인, 아일랜드인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었다.
이들 독일인들은 남부호주 주 정착과 함께 독일어 신문을 발간하면서, 호주 소수민족 신문 역사의 창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들 독일 교민신문은 호주의 주류 매체보다 앞서 당시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소개한 바 있다.
사진: 1887년 1월 15일자 The Prutestant Standard
호주언론에 비친 대한제국, 선교 그리고 한국여성
호주언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국여성으로 까지 확대됐다.
더 프로스테탄트 스탠다드(시드니, 1869-1895)는1887년 1월 15일 자 신문을 통해 한국 내 서방 선교사들의 활동 사항을 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 신문은 “한국에 파송된 5명의 가톨릭 교회 주교 가운데 3명이 처형됐고, 16명의 신부 중 9명이 순교했으며 더나아가 기독교로 개종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처형됐다”고 전하며 “광범위한 박해와 탄압이 벌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상황을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와 비교해 흥미를 더했다.
이 신문은 또 한국을 비롯 대부분의 나라에서 선교 활동은 해당국가의 정치 문제에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됐고, 이는 결국 박해와 탄압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1897년에는 NSW주 글렌 아이네스 마을의 지역신문(글렌 아이네스 이그제미너)이 한국 여성의 ‘성역’에 대해 소개해 이채로움을 던졌다.
이 신문은 “한국 여성의 방은 성역이자 성소였다. 범법자 남성은 부인이나 어머니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고, 방 안에 머무는 한 반역 등의 중죄인이 아닌 경범의 경우 방안에서 강제로 끌려나오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호주 언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더욱 뜨거워졌고, 빈도수도 높아졌다.
결국 이같은 과정을 통해 1919년의 3.1운동과 그 해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의 체계적인 독립운동 항쟁이 호주 언론에 다각도로 보도된 것으로 분석된다.
©톱 미디어 특별 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