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혁명 100주년’ 미국내 독립운동 성지를 찾아서(2)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 기획취재 시리즈>
Newsroh=로창현기자 newsroh@gmail.com
‘세계의 수도’ 뉴욕 중심엔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에 수많은 독립지사와 망명 유학생들이 조국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곳이 있다. 애국가가 작곡된 피아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70년대 조국 민주화운동의 聖所(성소)였던 곳이다.
뉴욕한인교회(담임목사 이용보). 이곳은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대항하여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독립 의지를 불태웠던 미주 한인들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1921년 창립이후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강용흘 김활란 김도연 장덕수 정일형 등 근현대 한국정치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기숙하거나 거쳐갔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벌인 한인사회 활동의 중심지였다. 뉴욕 인근 한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건네려고 찾아 왔고 해방전후 한인회와 학생회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 등 각종 단체들의 집회와 일시 거소로도 활용됐다.
뉴욕한인교회는 ‘글로벌웹진’ 뉴스로가 첫회에서 소개한 뉴욕타운홀에서 열린 삼일절 2주년(1921년) 기념식에서 창립의 端初(단초)가 마련됐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1300여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참석한 행사에 고무된 서재필 박사와 정한경 조병욱 등 한인유학생들과 감리교인 앤지 킴벌랜드 여사, 한국에서 20여년간 선교사업에 종사했던 존스 여사 등 뜻있는 미국인들은 한인교회 건립의 뜻을 모아 4월 18일 역사적인 창립 예배를 보게 되었다. 초기엔 매디슨애버뉴의 감리교회 삭크만 목사의 주선으로 현지 교회를 빌려쓰다가 1923년 감리교단의 지원과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맨하탄 남단(459 West 21 St.)에 독자적인 교회 건물을 마련했다.
이때 ‘Korean Methodist Church and Institute’란 독특한 영어명칭이 붙여졌는데, 그것은 단순한 신앙공동체 역할만이 아니라 민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1927년 10월 건물을 팔고 컬럼비아대와 허드슨강 인근인 114가에 건물을 매입. 이전했다.
교회 내 구성원들이 콜럼비아대학교의 한인유학생들이 상당 부분 차지하면서 유학생 중심의 활동이 중심을 이루면서 교회 이전도 학교 바로 인근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전 뉴욕 거주 한인들은 100명 내외였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유학생이었다.
뉴욕한인교회 창립 70년을 맞아 제작한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에 따르면 “삼일 운동은 뉴욕한인교회 창립과 가장 긴밀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뉴욕한인교회엔 전술하였듯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할 때 사용한 피아노를 비롯, 교회 간판과 성수잔 등이 보존돼 있고 독립운동 시절 수많은 사진과 문서 자료들이 있다. 교회내 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자료들에 따르면 1931년 6월2일 동부대회 학생총회 사진엔 독립운동가 김 마리아(1891-1944) 여사를 비롯한 한인지도자들과 당시 유학생들, 미국인 등 약 40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김 마리아 여사는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주인공으로 이듬해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고 1923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석사)을 거쳐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한 김 마리아 여사는 뉴욕에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뉴욕한인교회엔 3.1운동 당시 선교사 단체인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가 1919년 9월 29일 서울에서 기록한 3.1절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의 총 인구를 대략 1,700만 명으로 추정했다. 또한 1918년 개신교인이 8만7,278명이고,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21만9,220명으로 기재했다.
선교사들은 3.1독립운동이 주목할 만한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3.1절 만세 운동이 펼쳐진 7월20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체포된 사람들이 2만8,934명이고, 구타당한 사람들이 9,078명, 사망자가 631명, 17개 교회는 전소, 24개 교회는 부분적으로 파괴됐다. 또한 ‘일본은 부인했지만, 이미 3.1운동이 시작되자마자,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들과 여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면 발가벗겨서 고문당했고, 아무도 강간으로 처벌 받지 않았다’면서 ‘한국인들이 일본의 잔인한 만행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하루 속히 인종적인 차별이 철폐되기를 바란다’고 기록했다.
뉴욕에서 결성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한인유학생들은 뉴욕한인교회를 기반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1930년 황창ㆍ윤홍섭 등이 이곳에서 한국경제회를 발족, 경제잡지 <산업>을 발간했고, 1931년 컬럼비아대학교에 재미조선문화회도 결성했다. 일제의 만주침략 후에는 기성의 대한인국민회원과 동지회원 등이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뉴욕한인교회는 명실공히 뉴욕내 한인민족운동의 중요 거점으로 활용됐다.
이처럼 뉴욕한인의 독립운동과 민족활동의 역사를 담고 있는 뉴욕한인교회는 건물 노후화로 2015년 7월부터 전면적인 개축 공사에 들어가 교인들은 현재 예배를 인근 미국장로교회(PBC)에서 드리고 있다.
공사기간은 당초 2년정도 예상됐으나 2017년 뉴욕시 랜드마크위원회가 지정한 ‘역사 부지(Historic District)’에 뉴욕한인교회 건물이 포함됐다고 제동을 걸어 공사가 일시 중단되는 등 진통을 겪기도 했다. 최근 합의점을 찾아 다시 공사가 재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보 담임목사는 “1927년 교회를 114가로 옮겨올 당시 뉴욕의 한인들은 통틀어 100여명에 불과했다 당시 건물의 싯가가 3만5000달러였는데 이전 건물 매각대금 1만7000달러, 미국감리교회 지원금 1만2000달러에 유학생과 한인동포 20명이 모은 6000달러로 매입할 수 있었다"고 초창기 일화를 전해주었다.
당시 미국은 경제대공황의 시기여서 사상 최악의 불경기였다. 하루 종일 일해도 5달러 벌기도 힘든 시절, 한인들은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조지워싱턴브리지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번 돈을 십시일반으로 6000달러를 모은 것이다.
이용보 목사는 "백인들과 감히 식탁에 마주할 수도 없는 지독한 인종차별을 견디며 생계도 어려운 경제대공황의 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뼈빠지게 일하며 성금을 모은 것은 그야말로 신앙의 힘과 민족 그리고 독립의 열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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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뉴욕한인교회 8호실의 비밀
뉴욕한인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윤창희 간사는 뉴욕한인교회의 특별한 곳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일본의 만주침략(1931년 9월18일)을 규탄하기 위해 1931년 11월25일 작성한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대한인의 성명서(The Korean Manifesto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in Manchuria)'가 완성된 곳이 교회건물 4층에 있는 8호실이다”라고 소개했다.
성명서에는 1930년 1월26일 뉴욕한인교회에서 개최한 뉴욕학생회 제1차회의를 통해 조직된 '뉴욕동포 내지 학생운동 대책강구회의'(일명 뉴욕한인공동회)의 인물들로 허정 위원장, 고재완 서기, 황창하 회계, 오천석 윤병구 이기붕 이동제 우상룡(이상 선전위원) 박리근 홍태호 정경희 오장호 김일선(이상 수전위원)으로 나와 있다.
소제목으로 ▲ 일본의 대륙정책 ▲ 한반도병합과 일본의 만주침략 사이의 몇가지 시사점 ▲ 만주에서 한국인의 사례들로 나뉘어 당시 상황을 분석하고 수많은 조선인을 살상한 일본의 폭압을 고발하는 한편 2300만 조선민중과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시카고와 나성(LA) 디트로이트, 리들리 등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같은 목적으로 설립된 한인공동회와 연대해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등 세계 각국 주요 기관에 영문 책자를 발간 배포하고 미국 언론과 주요 기관 등을 상대로 당시 광주학생운동 등 조선에서 일고 있는 학생운동에 대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성명서는 당시 후버 미국대통령과 존 가너 미하원의장 등에게 발송됐다.
성명서는 대한인국민회 등 기존의 미주한인단체나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와는 별도로 뉴욕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해 전 세계를 향해 발표했다는 점, 또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미주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대응했음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의 표지엔 특별한 숫자가 있다. 성명서 제목 하단에 명기된 교회 주소에서 ‘No.8’이라는 표기였다. 윤창희 간사는 "어느날 4층 자료실에 가다가 문득 방 번호를 보게 됐다. 하늘색 페인트 칠 된 문에 흐리게 나와 있는 방 번호가 눈에 띄었다. 맨해튼 남쪽의 방, 바로 8호실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윤 간사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단다. 당시 회의실로 추정되는 8호실에서 역사적인 규탄 성명서가 제작된 것이다. 그는 "성명서에 교회 주소만이 아니라 방 호수까지 정확하게 표기한 것은 당시 선조들이 성명서가 후대에 길이 기억될 역사적 자료가 될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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