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

뉴스로_USA | 2019.10.0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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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근교 강촌에 가면 구곡폭포를 지나 산 넘어 문배마을이 있다. 마치 큰 산의 분화구 처럼 산정에 우묵하고 넓게 패인 곳에 약 10가구 정도가 있는 마을인데, 집집마다 등산객들을 상대로 음식점을 하고 메뉴는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거의 어슷비슷하다.

 

10여 년 전 가을 어느날, 혼자 등산을 하고 이곳에 들렀던 기록이 다음카페에 들어가 추억찾기를 하다 보니 아직 그대로 있기에 그 때를 추억하며 옮겨 본다.

 

산을 오른지 2시간...문배마을 입구는 밤송이가 지키고 있었다. 어느새 여름의 꼬리가 보이고 가을 냄새가 물씬 난다.

 

어쩌려고 혼자 술상을 받았다. 칡부침과 산채비빔밥까지... 검봉을 넘어 가니 나른하고 배도 고팠다... 먼저 좁쌀동동주의 씨언한 맛을 음미하며 기세좋게 한 잔을 들이키고 다음 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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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비빔밥도 깨끗이 비우고 또 한 잔...안주가 남아 또 한 잔...

산을 오른 몸은 달아 있었고 거기에 동동주 석 잔을 비웠을 뿐인데 얼굴은 활활 타 올랐다. 나머지는 생수병에 저장하고 일어섰다.

 

나이 50이 되도록 혼자 어디가서 주전자 채로 술을 시킨 건 분명 처음이었다.

내려 오는 길은 내 눈에 담겨진 저 망태버섯의 빛깔처럼 황홀했다.

구름 위를 걸었고 산 허리를 돌아 물살도 갈랐다.

 

색이 화려하면 독버섯이라는 속설에 당연히 독버섯일줄 알았는데 망태버섯은 중국에서 고급 요리로 쓰인다고 한다.

 

음식점 기둥에 걸려있는 주전자처럼 사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다. 주전자의 외출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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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 김승희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거친 파도가 바위섬을 삼킬 듯이 몰아칠 때

세계의 집에서 지붕들이 고요히 벗겨지고

유리창들이 환상의 격투로 부서질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삶은 거기에서 발레리나, 발뒤꿈치를 힘껏 높여들고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춤추는 발레리나,

관절이 연결된 척추 마디에 삐걱거림의 꽃송이가

벙글어지듯 솟아나고

바알갛게 신음하는 복숭아뼈를 견디며

바닥을 차고 올라가는 하얀 높이로의 힘겨운 이행

발레리나의 춤이 그 연루된 뼈들의 고통을 잊을 때

꽃이 고통의 연루로 피어난다는 것을 잊을 수 있을 때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목 없는 닭이 어두운 구름을 앞질러 날아가는

새떼들을 쳐다보는 시선으로

주전자 입에서 펄펄 날아가는 흰 김을 바라볼 때

혁명은 힘겨운 척추뼈와 복사뼈 사이의 연루에 있고

목 없는 닭의 떨리는 눈 속에 있고

하얀 김이 펄펄 나며 하늘을 조금 밀어내고 있는

그 공기의 힘겨운 파장 속에 있고

환상이 상심과 더불어 솟구쳐 일어나고

사랑이 한번만 사랑일 때

혁명이 한번만 혁명일 때

주전자 뚜껑이 팔팔 끓어오르는 김의 힘에 밀려

딱, 하고 저절로 벗겨져 떨어질 때

 

 

 

고구마를 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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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에 가까워진 엄마

고구마 좋아하신다고

보랏빛 각시붓꽃

밤나무 아래 흐드러진 5월

고구마를 심었다

하늘도 어여삐 여겨

비도 자주 내려주고

고구마 순도 무성하게 자라

줄기도 볶아먹고 김치도 해먹고

찬바람 불고 어느덧

캘 때가 되었다

 

이제 곧 낙엽 지고 눈 내리면

겨우내 밥에도 넣고

찐 고구마와 동치미를

엄마는 끼니로도 드시는데

어느 날 임플란트하느라

불편한 치아 때문에

내가 끼니로 고구마를 먹으며

엄마는 고구마를 좋아하신 게 아니라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신 게 아닐까

 

나이가 들며

몸으로 깨치게 되는 게 삶인지

아니, 불효인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구마를 캔다

아마존에서도 대박 났다던

호미로 캐다 고구마 찍고

서툰 호미질에 상처 난 고구마

엄마의 삶처럼 울퉁불퉁한

고구마를 문화재 발굴하듯 캔다

 

 

 

무를 솎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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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솎다가

어우러져 크고 있는 무를 솎다가

홀로 살아남은 무와

송두리째 뽑힌 무 사이에서

무심코 생각한다

씨 뿌려 같이 살게 할 땐 언제고

더 배불리 먹겠다고

정붙이고 사는 것들 떼어놓아

어느 무는 살리고

어느 무는 죽이고

이 무슨 죄를 짓는가

내 배를 채우려

무의 삶을 파탄내는 건가

얼마나 간절한 몸부림이면

온몸을 꼬아 서로 휘감아

사랑하고 있는 무를 솎다가

무를 솎다가

심을 권리와 뽑아 낼 권리까지

생사여탈권을

혼자 모두 움켜쥐고 있는

나는 검사스러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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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룡의 횡설수설’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hwang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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