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아시아·태평양 지역회의(부의장 이숙진)가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1919년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 언론 매체의 한반도 상황 관련 기사를 발굴해 책자로 발간한 내용이 아리랑 TV를 통해 소개됐다.
아리랑 TV의 주한 외교관 초청 대담 프로그램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의 송년특집에 출연한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아태 지역회의가 발간한 ‘대양주에 울려 퍼진 100년 전 독립운동의 함성’ 책자에서 언급된 당시 뉴질랜드 언론 매체의 한국 3.1운동 보도 상황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양국 관계 형성의 ‘씨앗’이 된 것으로 평가했다.
이날 방송에서 필립 터너 대사는 “100년 전 뉴질랜드의 몇몇 신문들이 한국의 3.1운동 소식을 보도했다”고 언급하면서 “뉴질랜드는 한국을 포함 다른 나라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의 언론 보도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터너 대사가 이 같은 언급을 할 때 아리랑 TV 측은 아태 지역회의의 책자에 포함된 뉴질랜드 오클랜드 스타의 3.1 운동 보도 기사 자료를 화면에 클로즈업했다.
터너 대사는 “뉴질랜드 국민들은 (100년 전부터) 항상 우리가 글로벌 커뮤니티, 더 넓은 세상의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교역과 번영뿐만 아니라 글로벌 평화 차원에서 뉴질랜드 국민들은 오래전부터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이런 맥락에서 1950년의 한국전쟁에 뉴질랜드가 6000명의 병력을 파병하게 된 것이고 뉴질랜드와 한국 관계 구축의 출발점이 됐다”라고 덧붙였다.
아태 지역회의가 발간한 ‘대양주에 울려 퍼진 100년 전 독립운동의 함성’ 책자에 따르면 100년전 한반도 안팎의 독립운동 상황은 호주와 뉴질랜드 전역에서 신속하게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당시 한반도의 독립운동 소식을 호주 땅에 가장 먼저 알린 언론사는 NSW주 알버리 지역의 ‘보더 모닝 몰과 리베리나 타임즈(1903-1920), NSW주 탬워스의 ‘데일리 옵저버’(1917-1920), NSW주 내륙 마을의 ‘메이틀랜드 데일리 머큐리’(1834-1939) 등 지방에서 발간되던 지역신문들이었다.
이들 매체 모두 3월 15일 한국의 3.1 만세운동이 한반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사실을 전했다.
뉴질랜드에서도 같은 날 오클랜드 스타(1870-1945) 등의 매체가 이 소식을 처음 타전했다.
오클랜드 스타는 “항일 운동이 한국에서 치솟기 시작했으며 독립을 요구하다 4천 명이 체포됐다”고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사진=아리랑 TV 화면 캡처):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 2018년 3월 주한 뉴질랜드 대사로 부임한 터너 대사는 뉴질랜드 외교부 내의 대표적 북아시아 전문가로 알려졌으며 모국어인 영어 외에 프랑스어와 일본어가 능통하며, 중국어와 한국어로 가벼운 소통이 가능하다.
(사진=아리랑 TV 화면 캡처): 아리랑 TV의 자료화면에 클로즈업 된 1919년 3월 15일 자 오클랜드 스타의 3.1운동 관련 기사.
20세기 중반까지 뉴질랜드의 대표적 유력지였던 오클랜드 스타(1870-1945)는 “항일 운동이 한국에서 치솟기 시작했으며 독립을 요구하다 4천 명이 체포됐다”는 등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항일투쟁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3월 14일에 타전된 상하이 발 로이터 통신 기사를 전재한 이 신문은 “(고종) 황제의 장례일을 맞아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자주독립을 외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오클랜드 스타는 또 호주의 일부 언론과 마찬가지로 “이번 독립운동은 파리 평화 회의가 (한국의) 자주독립을 인준했다는 신념에 동력을 받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행진에 참여한 수천 명의 시위대는 헌병대와 충돌했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이 체포됐다”면서 “이 소요는 지방으로도 확산됐고, 일부 시위 대원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유혈 충돌로 번졌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서는 또 “일본 측의 발표에 따르면 대부분 학생들로 구성된 4000여명의 한국인들이 체포됐지만 부상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면서 “시위는 선교사들이 부추겼다”고 덧붙였다.
자료제공: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아시아·태평양 지역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