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원 일대기 : 8달러의 기적 13] 재정보증과 병적증명 취득에 얽힌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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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6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시 우리 나라의 사회 경제적 상황으로는 나의 미국 유학 꿈은 도무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다. 막 전쟁이 끝난 1955년 당시는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기 힘들 정도로 온 국민이 핍절한 때였으니, 배나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도 바늘구멍 뚫기 만큼이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어쨋거나 내친 걸음이니 갈 때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수속을 밟기로 했다. 그 첫 관문은 여권을 받는 일이었는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외무부 여권과에 찾아가 미국의 20여개 대학에서 날아온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확약 서신들을 자랑스레 내밀었더니,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재정보증서와 병적증명서를 가져 오라고 했다. 둘 다 내게는 돌파하기가 어려운 과제들이었다. 우선 재정보증서만 하더라도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 유학생 재정보증서는 국내가 아니라, 유학을 가고자 하는 나라의 시민이나 단체에서 받아 내야 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조차 어려울 판에 생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미국땅의 그 누구가 나에게 생활비 일체와 추가로 들 지도 모르는 학비를 보증해 주겠다고 나설 것인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나 텅빈 하늘에서 금줄을 찾아 오라는 식의 요청이었다. 일단 입학허가서를 보낸 학교들에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재정보증서를 보내줄 개인이나 단체를 소개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부자 나라 미국에는 자선 사업가나 각종 단체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니 혹 어떤 천사가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편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서신들이 도착했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불가하다'는 내용의 서신들만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여러 주가 지나자 거의 체념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입학 허가서를 보낸 25개 대학들의 대부분에서 '불가' 서신들을 받기만 하던 어느날,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 사우스 웨스턴 미주리 주립대학(현 미주리 주립대학)의 '앤나 블레어'(Anna Blair)라는 여 교수로부터였다. 그녀의 편지 내용은 내가 거할 곳은 물론 일할 곳과 학비 보조를 해주겠다는 확약을 한 로터리 클럽이라는 단체가 있으나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너무 늦게 서신을 보내 미안하다"는 글과 함께 재정보증서를 따로 동봉해 보내왔다. 뛸 듯이 기뻤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극약처방'을 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빽'과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대학 입학이나 졸업도 연줄이나 돈으로 해결하던 때였으니, 병적증명도 안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서 일하며 장래 학비로 모아 두었던 돈을 몽땅 꺼내서 아는 사람으로부터 소개받은 병무청 직원에게 찔러 주었다. 그러나 '문제 없이 해 주겠다'던 그 병무청 직원은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날 종적을 감춰 버렸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장관 '빽'으로 병적증명서를 얻다 생명과도 같은 몫돈이 하루 아침이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허탈감에 빠져 있던 어느날, 갑자기 6개월 전에 먼저 유학을 떠난 경복고 동창 친구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친구 아버지는 당시 세력이 대단하던 장관이었다. 나는 유학을 돕는다며 친구 집을 몇차례 방문하여 직접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간단하게 편지 한장만 써주면 일이 잘 풀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로 장관실을 찾아 갔다. 갑작스런 나의 방문을 받은 친구 아버지는 "아직 유학을 떠나지 못했느냐"며 의아스런 투로 물었다. 나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요즘은 편지 한 통으로도 안 통한다"며 그자리에서 병무청에 근무한다는 옛 부하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내 사정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 병무청으로 아무개를 찾아가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와 몇차례 마주친 직원이었다. 다음날 병무청을 찾아가니 그 직원이 웃는 얼굴로 "학생 빽이 대단하더구먼!' 그러며 병적서류를 내밀었다. 늘 고압적이고 뻣뻣한 태도로 나를 대하던 그의 태도가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여권을 받기 위한 최대 난관 두가지를 돌파했다. 당시 유학 목적의 여권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자격시험들을 보아야 했는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늘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개월 씩을 기다려서 한가지 시험을 치르고 나면 다른 시험을 보기 위해 또 몇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몇 개월에 걸쳐 문교부, 외무부 시험은 물론이고 대사관 시험까지 치렀는데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으나 유학을 가야 살 길이 열린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밤새워 공부한 결과였다. 수속을 시작한지 무려 2년 만에 여권을 손에 쥐고 나니 무슨 특권을 갖게 된 것 마냥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 중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 여권을 소지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엇보다도 월남 후에 내 '존재'를 증명해 줄만한 아무런 증명서나 서류가 없던 처지에서 정부가 발행한 여권은 그 의미가 각별했다. 비로소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는 사실 때문에 며칠을 들뜬 기분으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 여권을 보여 줬더니 깍듯이 예를 갖추어 대하기에 지레 쑥스러 했던 기억이 있다.
유여곡절 끝에 여권을 받았으나, 이제는 비자를 받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은 요령껏 재주를 부려 어찌어찌 해서 얻었으나, 미국행 비자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식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며칠에 걸쳐 비자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영사관을 방문했더니, 대번에 "남한 주소지나 부모 형제나 친척이 없는 등 신분이 불확실하다"며 퇴짜를 놓았다. 한마디로 "당신 같은 처지의 학생이 미국에 가면 안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여권을 내밀며 사정을 했으나 역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침 유엔한국재건단에서 우편취급일을 할 당시 외교행랑을 전달하며 얼굴을 익히게 된 사무직원이 있기에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 또한 "저 영사는 아직 당신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비자를 내 준 적이 없다"며 "앞으로 무슨 수를 동원해도 비자를 받을 가능성이없다"고 잘라 말했다. 낙심이었다. 그런데, 막 뒤돌아서 나오려는 내 등 뒤에다 대고 말꼬리를 흐리며 던진 한 마디가 귀에 맴돌았다. "도지사가 보증을 서주면 모를까…"라는 말이었다. 꽉막힌 내 처지가 안타까워 그가 무심코 툭 던진 말이었으나,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그 한마디에 어떤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껏 북한에서 탈출한 이후로 노숙자와 진배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가느다란 가능성의 문이 열려 있고, 그 틈새를 비집고 난관을 헤쳐나온 경험들이 나에게 있지 않은가! 나중에 영사관의 한국인 사무직원에게 물으니 영사와 도지사는 이미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다고 했다. 단단히 결심을 한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도지사를 만나기 위해 경상남도 도청으로 찾아갔다. 프론트 데스크에 접근하니 안내직원이 "무슨 일로 찾아 왔느냐"고 했다. "미국유학을 가기 위해 지사님 서신이 필요해서 왔다"고 하자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장 건물 밖으로 나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는 나를 정신이 이상해진 청년 취급을 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경비원들과 직원인 듯한 사람들도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하지만 나는 매일 도청을 찾아 갔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데스크 사무직원은 내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도지사님이 학생같은 사람의 사정을 들어줄 시간도, 들어줄 리도 없다"며 "제발 그만 좀 찾아 오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도 계속 찾아 가니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고, 경비원들도 얼굴을 찌프리거나 비웃는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도청에 '출근'했다가 다시 퇴짜를 맞고 되돌아 오는 팍팍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 김명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