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브레이크뉴스=스페인 경창수 기자>
성추문으로 인한 몰락이 성악계의 대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얘기다.
세계적인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79)의 명성이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WNO)는 2일(현지시간)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에서 도밍고의 이름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WNO는 이날 이사회를 열고 ‘도밍고-카프리츠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카프리츠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카프리츠는 이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재단 이름에서 따왔다.
도밍고는 WNO에서 1996~2011년 예술감독 및 총감독을 지냈다. 지난달 25일 미국 음악인 조합(AGMA)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밍고는 WNO에 재임하던 시절을 포함한 1980년대부터 총 27명의 여성을 성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벼운 접촉부터 원치 않는 성관계까지 광범위했다. WNO의 이사인 팀 올리어리는 WSJ 인터뷰에서 “독립된 조사기구의 결과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사회 내에서 아무 이견이 없었다”고 했다.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이 처음 나온 건 지난해지만 WNO가 조처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밖에도 도밍고에 대한 조치는 세계 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스페인 문화부는 지난달 조사 결과가 나온 후 도밍고의 오페라 출연을 금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5월 마드리드에서 예정됐던 출연이 취소됐다.
고향인 스페인의 결정에 대해 도밍고는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지난달 27일 페이스북에 “내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다”며 “누구에게도 공격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누구의 경력을 해칠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불과 이틀 전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이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은 여성들을 존경한다”고 했던 사과 내용을 뒤집은 것이다.
도밍고의 명성에 흠집을 낸 것은 사과 번복뿐이 아니다. 미심쩍은 은폐 정황도 나왔다. 도밍고가 AGMA 발표 전 이 결과를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50만 달러(약 6억원)을 조합에 기부하는 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황이다. 뉴욕타임스가 조합 간부와 도밍고 사이에 오간 e메일을 폭로하면서 거래가 밝혀졌다. AGMA는 지난달 “이 기금을 성폭력 방지 교육 등에 사용하려 했던 의도”라 해명했지만 AGMA의 부회장인 새뮤얼 슐츠는 이달 2일 사임하면서 사직서에 이 돈을 "침묵의 대가"라 폭로했다.
도밍고는 20세기를 풍미하고 아직도 건재한 유일한 성악가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유일한 라이벌로 불렸으며 다양한 종류의 오페라 배역을 맡을 수 있어 각광 받았다. 바리톤과 테너를 넘나들며 50년 넘게 활동해 왔으며 성악가뿐 아니라 지휘자, 예술단 감독으로 활약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와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통해 후배를 양성하는 모습도 보여왔다. 올해만 해도 함부르크, 루체른, 모스크바, 빈, 베로나 등 유럽 전역에서 오페라 출연 계획이 잡혀있다. 지금껏 150개 넘는 배역을 맡으며 유명해진 ‘쉬면 녹슨다(If I rest, I rust)’라는 그의 신념도 이번 파문으로 빛이 바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