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태평양에서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호주 입장에서 외부의 적에 의한 침략으로 직접적 공포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미국과 함께 태평양전쟁을 치른 호주는 이를 계기로 미국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국가적 위상과 함께 힘의 균형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종전 기념일은 그 의미가 크다. 사진은 75년 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브리즈번(Brisbane) 시민과 군인들. 사진 : Australian War Memorial
호주, 미국과 함께 일본 침공 막아... 전후 ‘동맹국’으로서의 강한 연대 구축
8월 15일은 우리 모국 대한민국에게 있어 가장 의미 있는 기념일이다. 1919년 일제에 합병된 뒤 36년 만에 광복을 이루었고, 이로써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75년 전 이날, 독일-이탈리아와 동맹국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실질적인 항복이었다. 앞서 7월 26일, 미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게 항복 조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국가 전체가 초토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은 이를 거부했지만 8월 6일 히로시마에,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여되자 포츠담 선언 수용을 방송으로 공표한 뒤 미국에 항복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호주 역사의 아픈 상처이다. 역사상 전 세계 모든 전투에 참전했던 호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총 10만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고 수만 명의 부상자를 냈다. 2차 세계대전에서만 호주 병사는 2만7천 명이 전사했고 2만3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2차 세계대전은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됐다. 유럽에서는 영국-독일전쟁 및 독일-소련 전쟁, 그리고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는 중국-일본 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주요 국면을 이루었다.
태평양전쟁은 호주 역사에서 외부의 적에 의한 침략으로 직접적인 공포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일본군에 의한 다윈(Darwin, Northern Territory) 폭격과 시드니 하버(Sydney Harbour)에서의 잠수함 공격은 호주를 이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영국군이 있음으로써 난공불락이라 생각했던 싱가포르가 일본군에 함락되고 호주 8사단 전 병력이라 할 만한 1만5천여 병사가 포로로 잡히면서 호주는 전쟁에 대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75년 전 8월 15일은, 호주가 겪었던 역사상 가장 큰 위협이 마침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과 그 아픔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또한 관련 기념일도 별 생각없이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의 아픔을 떠나 태평양전쟁이 남긴 정서는 오늘날에도 호주인의 의식 속에 남아 있다. 동아시아를 침공한 일본이 싱가포르에 주둔한 영국 해군을 격파하고 1만5천명의 호주 병사를 포로로 잡았을 때 호주는 대영제국이 더 이상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방어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싱가포르를 함락한 일본은 곧이어 태평양 도서 국가를 침공한 데 이어 아시아 지역으로 전장을 확대했고 호주 본토를 폭격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맺은 동맹은 60여년이 지난 후 호주가 왜 미국을 따라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분쟁지역에 병사를 파병했는지, 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 경제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중국의 대외정책에 호주가 어떻게 미국과 공조하는지, 심지어 호주가 어떻게 다문화 이민국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분석이다.
태평양전쟁의 끝을 알리는 일본의 항복과 종전 75년을 맞아 호주 공영 ABC 방송은 호주 외교전문가들을 통해 종전의 의미와 함께 호주-미국 관계가 호주에 미친 영향을 진단, 눈길을 끌었다.
호주 민간 국제정치 연구소인 ‘로위연구소’(Lowy Institute)의 나타샤 카삼(Natasha Kassam) 연구원은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맺은 동맹에 대해 호주인 대부분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축하하는 멜번(Melbourne) 거리에서 호주공군 여성 예비군(Women's Auxliary Australian Air Force)이 경찰을 잡고 기쁨의 키스를 나누고 있다(사진). 사진 : Australian War Memorial
▲ 미국과의 동맹은 호주 DNA의 일부= 호주의 국제정치 민간 연구소인 로위연구소(Lowy Institute)에서 대국민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나타샤 카삼(Natasha Kassam) 연구원은 “지난여름 산불, 이어진 COVID-19 사태를 감안할 때 호주인들은 지금이 상당히 위험한 ‘재난 상황’이라 느낄 것”이라며 “지금과 같은 국가적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에 비견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올해의 태평양전쟁 종전 기념은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카삼 연구원은 외교관 출신으로 중국 및 솔로몬 제도에서 근무한 바 있다.
그녀는 호주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2차 세계대전 당시와 같은 수준으로 높아진 가운데 한 가지 정서는 분명하다고 보았다. 대부분 호주인들이 미국과의 동맹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로위연구소의 연례 조사를 근거로 “호주인들이 백악관 책임자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 때에도 양국의 동맹관계에서만은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고 설명한 카삼 연구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와 미국, 뉴질랜드가 서명한 ‘ANZUS 동맹’은 오늘날 ‘더 다양한 역할’을 끌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상황에서 이 동맹을 지원하고자 호주군이 미국 주도의 해외정책에 군인을 파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녀는 “냉전을 겪지 않은 젊은 계층에서는 이 동맹에 대한 회의감이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그 실질적인 사례는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기능장애”라고 분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령층은 전쟁(2차 세계대전) 말기의 실질적 위협을 기억하고 있다.
카삼 연구원은 “그들은 냉전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호주를 보호하기 위해 맺은 동맹을 잊지 않는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과의 동맹은 좋든 나쁘든 모든 연령층의 정서에 남아 있다고 진단했다.
▲ ANZUS 동맹은 호주의 위상과 군사력의 균형을 유지시킨다= 호주-미국간 관계 및 미국에 대한 이해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시드니대학교 부설 ‘United States Studies Centre’의 존 이(John Lee) 박사는 “호주-미국간 동맹은 호주가 다른 지역에서 가질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지위 및 영향력을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호주는 결코 태평양의 주요 강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박사는 호부 외교부 수장이었던 줄리 비숍(Julie Bishop) 전 장관의 선임 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이 박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협력할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장거리 폭격기, 미사일, 핵무기 등 군사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미국은 소위 ‘전진배치’(forward deployed)라는 군사적 능력이 필요했고 그 점에서 호주는 우선 선택할 만한 기지였다. 바로 이것이 “(호주-미국간) 동맹 결성의 기반”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반면 이 박사는 “초강대국과 동맹을 이어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항상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많지 않다”며 “미국의 전술이나 접근법에 동조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호주는 중국과 좋은 교류를 이어가고 싶지만 중국이 원하는 목표나 결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직접적인 예로 중국의 ‘일대일로’(The Belt and Road)나 남중국해(South China Sea) 전략이 지역의 이익보다는 자국 중심으로 계획된 것을 꼽았다.
호주-미국간 동맹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세계에서 이탈함으로써 호주가 태평양 지역을 대표해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사진은 시드니의 글리브 아일랜드 부두(Glebe Island wharf)에서 호주 해군 ‘HMAS Manoora’ 호에 승선한 2차 대전 참전 호주 병사들. 사진 : Australian War Memorial
이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맺어진 호주-미국간 동맹은 오늘날 태평양 지역에 군사적 힘의 균형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중국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모든 지역 국가들에 비해 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미국 없이는 힘의 균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이는 중국이 실제로 호주에 대해 물리적 위협을 가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 미국과의 동맹, 새로운 자신감= 캔버라대학교 국가안보연구원(National Security Institute, University of Canberra) 원장인 피터 레이히(Peter Leahy) 교수는 전후 미국과의 새로운 동맹에서 비롯된 사회-경제 부문의 긍정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먼저 “자유당의 로버트 멘지스 총리(Robert Gordon Menzies. 1939년 4월 26일-1941년 8월 29일 재임)에서 노동당 존 커틴 총리(John Curtin. 1941년 10월 7일-1945년 7월 5일 재임)로 정권이 바뀌면서 군사적 협력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면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구세계에서 이탈함으로써 호주는 태평양 지역을 대표해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레이히 교수는 호주 육군에서 37년간 복무했으며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호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가 언급한 ‘긍정적 측면’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군사적 초강대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독립국가로 부상한 것 이상으로 호주가 누린 경제적-문화적 혜택”이라는 설명이다.
아울러 ‘태평양 지역에서의 자신감’은 “호주가 경제적으로 문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식량생산에서 제조업으로 옮겨가 세계 각국과 거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또한 호주를 보다 다문화적 국가로 만들었다. 레이히 교수는 “전후 어려움에 처한 유럽 국가에서 시작해 이후에는 베트남,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이민자 물결이 나타났다”면서 “호주는 이 새로운 이민자들로부터 큰 혜택을 받았다”고 진단했다.
정서적 측면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의 노력이 남긴 혜택이다. 레이히 교수는 “당시 독일과 일본은 전 세계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며 “그 참전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원칙과 자유’를 위해 전장으로 나갔고 오늘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레이히 교수는 이처럼 2차 세계대전 및 미국과의 동맹이 호주에 미친 상당한 영향을 인정하면서 “이것이 지금의 호주라는 국가 형성의 유일한 것은 아니며 또 그런 시각을 가져서도 안 된다”고 덧붙였다. “지금의 국가 형성이 있기까지는 많은 요소들이 있으며, 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 ‘ANZUS 동맹’을 가져온 주요 사건
-1941년 12월 7일 : 일본, 미국 진주만(Pearl Harbour) 폭격
-1942년 2월 8일~15일 : 영국군이 주둔하던 싱가포르, 일본에 함락
-1942년 2월 16일~19일 : 일본군, 필리핀-말라야-태국-괌-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홍콩 침공
-1942년 2월 19일 : 일본군, 북부호주 다윈(Darwin, Northern Territory) 폭격
-1942년 5월 31일 : 일본 해군 잠수함, 시드니 하버(Sydney Harbour) 진입
-1945년 8월 6일 및 9일 : 미국,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15일 : 일본, 미국에 항복 선언. 태평양 지역에서의 2차 세계대전 종결
-1951년 9월 1일 : 호주-미국-뉴질랜드, ‘ANZUS 동맹’(Australia, New Zealand, United States Security Treaty) 체결
김지환 기자 kevinscabin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