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15] 1955년 스프링필드에서 맞은 '봄날'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여의도 비행장에서 출발한 나의 미국행 비행기는 동경, 괌, 호노룰루, 샌프란시스코 등 무려 4군데의 기착지를 거쳐 거쳐 미주리 세인트 루이스 공항까지 사흘이 걸렸다. 때는 1955년 4월 초순이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니 향긋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세 시간쯤 달렸을까, 여기 저기 도시들을 거치던 버스가 드디어 학교가 있는 스프링 필드 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저만치에서 백인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는 모습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편지로만 수년 동안 주고받던 애나 블레어 박사였다. 상기된 얼굴의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엉거주춤 그녀의 포옹을 받은 나는 연신 '땡큐'를 연발하며 머리를 숙였다. 블레어 박사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그녀가 조심스런 말투로 내게 물었다. "도원, 네 수중에 얼마나 가지고 있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소지한 돈을 확인하는 체 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8달러" 그녀가 놀랜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흠, 네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적은 돈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군. 괜찮아 걱정말라고!" "……" 그녀는 멋적은 분위기를 덮으려는 듯 속사포 처럼 다시 물었다. "공부하며 일도 할 수 있겠지?" "그럼요, 일자리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오늘 당장이라도 할 수 있겠어?" "예에? 그럼요, 하고 말고요!" 애나 블레어 박사는 내가 활기에 찬 목소리로 당장이라도 일할 뜻을 밝히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편지로 주고 받았을 때 느꼈던 따뜻한 감정이 피부로 느껴져 왔다. 속으로 '하늘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외쳐졌다. 도대체 나 같은 가난뱅이 유학생에게 이 같은 행운이 오다니! 집에 도착하자 블레어 박사는 점심으로 치즈 샌드위치와 주스를 내 왔다. 그녀는 나를 위해 비워 두었던 방을 2년 전에 렌트로 다른 학생에게 주었다면서 방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자기 집에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당장 작업화를 사야 한다며 전화로 어떤 학생을 불러서는 나를 신발 가게로 안내하도록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시어즈 백화점으로 가서 보기에도 묵직하고 튼튼해 보이는 작업화를 4불을 주고 구입했다. 이렇게 해서 전 재산 8불에서 반절이 떨어져 나갔다. 블레어 박사 집에는 내 일자리 리스트가 쌓여 있었다. 모두 잔디 깎는 일이었고, 시간당 25센트였으나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다. 도착 당일 오후 2시경의 스프링필드 태양 빛은 한 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당시 잔디 깎는 기계는 손으로 밀어야만 하는 것이었으나 한국에서 이미 온갖 잡일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나에게는 식은죽 먹기로 쉬웠다. 기계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데로 싹둑 싹둑 가지런히 잘려 넘어진 잔디에서 풍기는 풀내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스프링필드의 봄날이 온통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일자리는 잔디 깎는 일 외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 식사를 무료로 제공받는 학교 식당 일 등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나는 학교 수업을 빼고는 매일 서너 곳의 일자리를 옮겨 다니며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보통 새벽 1~2시까지 영어사전을 펴들고 그날 수업 시간에 들은 강의 내용을 복습했다. 한국에서부터 제법 영어를 말하고 읽을 수는 있었으나, 미국 대학 강의를 듣고 이해하기에는 힘에 겨웠다. 미국 친구들이나 교수들은 한곁같이 친절하게 나의 학업을 도왔다. 그들은 강의 노트를 빌려주기도 했고, 교수들은 따로 오피스로 찾아간 나에게 잘 알아듣지 못한 수업 내용을 친절하게 복기해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당 1달러'가 어때서? 다행스럽게도 당시 그 지역에는 이미 사립대학 등에 다니는 한국 유학생들이 5~6명이 있어서 종종 주말에 파크에서 고기를 구워 먹거나 이런 저런 학업 관련 얘기들을 나누며 서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들 대부분은 부잣집 자제들이었으나, 규율이 엄격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으므로 주로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자주 모이곤 했다. 그들 가운데는 지금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도 있고,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친구도 있다. 정신없이 한 한기를 지내고 여름방학을 앞두게 되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사우스 웨스턴 미주리 주립대학은 쿼터제 수업을 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겨울, 봄, 가을 학기를 듣고 여름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위해 학교를 떠났다. 나 또한 수업을 듣는 짬짬이 여름방학 동안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유엔한국재건단(UNKRA) 우편물 취급소에서 일하던 당시 한 미국인 엔지니어가 유학을 준비중이던 내게 알려준 일자리가 생각나 아르바이트 신청서를 보냈다.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의 북쪽 지역에 있는 미니왕카(Miniwanca)라는 캠프였다. 봄학기가 끝날 무렵 그곳으로부터 일할 자리가 많다며 초청장이 날아 왔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루 일당이 1달러 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숙식을 제공해 준다는 조건이었지만, 당시 임금 수준으로도 형편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내가 일당 1달러를 받고 미시간의 캠프에 가서 일할 생각을 주변 사람들에게 밝히자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던 교수 한 분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만류했다. 그는 "1년 생활비가 400불 정도인데, 그곳에서 일해서 어떻게 그 돈을 모으겠느냐"고 했다. 특히 한국 유학생 친구들이 내 얘기를 듣더니 한심하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그들은 뉴욕이나 시카고 등지에서 일을 하면 하루 20불을 너끈하게 벌 수 있는데, '일당 1불'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딴은 그랬다. 하루 10불이나 15불고 아니고, 정상적으로 벌 수 있는 금액의 20분의 1에 불과한 1불이라니!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나는 이제 막 미국에 온 초짜 유학생으로, 미국 문화를 배우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액수에만 매달려 바쁘게 일을 쫓으며 한여름을 보내다 보면 뭔가를 생각하고 배울 여지가 없을 것만 같았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지금처럼 일을 하면서 보충하면 될 것이고, 느긋하게 미국사람들을 상대하고 미국문화를 배우는 기회를 삼는 편이 먼 장래를 위해 좋을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당초 빈 털털이 신세로 살아온 마당에 낙원 같은 이땅에서 다음 학기 생활비 걱정을 한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탈출 이후 온갖 고생을 다 해온 나는 그만큼 용감해져 있었다. 교수와 친구들의 만류를 무릎쓰고 내린 미시간 캠프 미니왕카의 아르바이트 일은, 내 평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가운데 하나였음이 그 여름, 그리고 이어지는 여름에도 입증되었다. 겨우 한여름 아르바이트 일자리 결정에 무슨 큰 의미를 담아서 말할 수 있겠는가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미시간 미니왕카 캠프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내 인생의 주요 행로가 정해진 사연들을 듣게 된다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술하게 될 것이다. 학기를 마치고 서둘러 당도한 캠프 미니왕카에는 디렉터 하나에 일꾼이라고는 나 하나가 전부였다. 캠프 미니왕카는 주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기독교 수양관이었는데, 막 건축이 끝난 50개의 캐빈이 여기저기 정연하게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건축만 덩그러니 끝냈을 뿐 안팎으로 다듬고 손을 대야 할 곳이 많았다. 주변에 조경시설도 안 되어 있어서 그 또한 두 사람 몫이었다. 완전한 캠프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는 할 일이 태산이어서 막막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미시간호가 바로 곁에 있었고 캠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환경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삶의 스승들을 만나게 된 것을 두고 두고 큰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첫 스승은 캠프 디렉터인 '프레스톤 오위그'였다. '와제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매우 사려깊고 사색적인 사람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날 밴치에 앉아 쉬는 동안 그가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도원, 네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선 안돼. 만약 네 스스로를 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너를 그렇게 취급하게 될거야." 당시 그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약간은 의기소침해 보인 내 모습에 어떤 도움말을 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와제피는 조용하면서도 맡은 일을 묵묵히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여름 내내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자연환경을 벗삼아 일하면서 캠프 미니왕카에 온 것은 정말 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탈북 이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비로소 미시간 호변의 캠프 미니왕카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매일 땀흘려 일하는 노동이었지만, 거기에서 어떤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생일대의 수확이었다. 넉넉하고 포근한 자연 환경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 김명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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