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언협 유럽대회 후기 5] 전승기념관과 아르바트 거리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오늘은 모스크바 방문 나흘째입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하여 러시아 전승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밤새 내린 함박눈이 갓길에 쌓여있고 대형 제설 차량들이 아직 치우지 못한 눈을 치우느라 크르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눈 내린 고도의 풍광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한참을 달리다 문득 엊저녁에 가졌던 러시아 문명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블라디미르 수린(65) 박사의 강의 내용을 토막 토막 되살려 보았습니다. 수린 박사는 지난 2005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러시아와 한국의 ‘공생국가론’을 담은 ‘코리아선언’을 발표하여 학계와 정.재계에 비상한 관심를 불러 일으킨 분입니다. 공생국가론은 남북한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포함한 2500만명 정도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풍부한 러시아 자원을 개발하면 양국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줄 것이란 내용입니다. 처음엔 고도로 테크닉이 발달하고 인터넷으로 팽팽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리타분하고 생뚱맞게 ‘노동’이니 ‘개발’이니 하는 얘기가 뭔가, 하는 의문부터 일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직접 대면하여 그 의문을 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견, 그의 강의는 ‘공생국가론’과 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를 최초로 한국에 소개한 <겨레일보> 박종권 대표의 동시통역으로 1시간 반 정도 진행한 강의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습니다.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조차도 ‘미국은 위대하며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면서 “모순 덩어리인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모순된 세상을 날카롭게 파헤쳐 냈습니다. 그는 서방 선진국들과 제3세계 사이의 이런 저런 ‘불공정한 게임’의 예들을 들어가다가 현재 미국 중심의 경제 시스탬의 허구성을 고발했습니다. '미국의 부채가 현재 65조 달러에 이르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에게도 부채가 없는’ 희한한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부채가 없는 미국’이 가능한 것은, 미국만이 아무런 통제없이 무한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국제통화 발행국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가짜돈’으로 살아가는 나라인데, 자국 내에서 실제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진 생산품 그 이상의 것을 마음껏 소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서방 국가들이 문제의식 없이 미국의 이같은 경제행태를 따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랍권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은 달러에 매달려서 쩔쩔 매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로부터 석유를 공급받고 있는 미국은 큰 걱정없이 살아가는 시스탬은 모순이라는 겁니다. 그가 막판에 말한 “노동이 진짜 경제이고, 진짜 자본은 노동에서 나온다”는 짤막한 경귀는 저녁 강의의 핵심이었는데요, ‘가짜 노동'을 통해서 '가짜 돈'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시스탬을 바꿔 보자는 것이고, 바로 러시아와 남북한이 ‘진짜 노동’을 통해 시베리아 극동지역을 개발하여 ‘진짜 경제’의 시스탬을 만들어 보자는 겁니다. 뭐 주요 국제경제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 IBRD(세계은행), WTO(세계무역기구)는 물론이고 유엔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미국 일변도의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도 사실이어서, 그다지 놀랄만한 비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재편된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시스탬에 대한 반발이면서, 그 이면에는 세력 재편에 대한 암시까지 담겨 있어서 자본주의 미국도 펄쩍 뛰고 달러에 맛들인 사회주의 중국도 펄쩍 뛸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쨋거나 새로운 세계의 모델을 찾으면서 러시아의 자원과 한민족의 저력을 엮어낼 생각을 한 그가 대단해 보이고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강의를 듣는 내내 그가 제안한 ‘공생국가론’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태껏 남북간에 싸우기 바쁜 마당이니 ‘공생국가’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여력도 없지 않나 하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과일이라도 담을 그릇이 깨어져 있으면 담을 수도 없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요, 분단상황은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민족에게 옥토를 뒤덮고 있는 엉겅퀴 같은 것인가 봅니다.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은 소련”? 한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전승박물관이 있는 승리공원 뒷쪽에 도달했습니다. 차를 내려 눈덥힌 널따란 4차선 도로를 20여분쯤 걸어 들어가다 보니 하늘높이 치솟은 길쭉한 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3면으로 된 ‘전승기념탑’인데요, 얼핏 미국 워싱턴 디시의 ‘연필탑’을 연상시켰습니다. 멀리서 보니 탑 꼭대기에서 20여미터 아래쯤에 무슨 벌레가 붙어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서 올려다 보니 나팔을 불고 있는 모습의 조형물이었는데요, 게오르기라는 러시아 정교회 승리의 신이라고 합니다. 전승기념탑에는 2차대전 당시의 격전지가 세겨져 있습니다. 높이는 141.7미터나 되는데요, 전쟁 기간이 1417일인 것을 표현한 것이랍니다. 러시아 신혼부부들은 혼인신고를 마치고 가장 먼저 이 탑에 들러 인증샷을 찍고 신의 축복을 기원한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을 물리친 쿠투조프 장군이 여기서 전승 기념식을 가진 전통이 있고, 지금도 5월 9일이면 매년 이곳에서 대규모 기념식을 연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부가 매년 전승기념일 행사 소책자의 겉표지에 “기억하라, 세상을 구한 것을!(기억한다, 구원된세상은!) ”이라는 문구를 넣어 방문객들에게 나눠주는데요, 이곳이야말로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담고 있는 ‘성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는 2차대전 당시 2400만명~2700만명의 희생자를 냈고, 이는 당시 10여 참전국 전체 사망자의 60%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더구나 2차 대전 중 독일군 사망자의 80%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죽었고, 이때 크게 전력에 손실을 입고 패퇴한 독일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대신 러시아는 어떤 나라보다도 ‘여초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이 2700만명이지 당시의 한국 인구가 몽땅 사라진 셈이니 전쟁의 참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겠죠. 많은 서방 여행객들이 이곳에 와서 이같은 사실을 알고는 상당히 놀라게 된답니다. 그도 그럴것이 ‘2차대전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다 이겨 놓은 건데, 약삭빠른 소련이 막판에 밥숟가락 슬쩍 올려놓고는 과실만 따먹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죠. 사실 우리도 초등생 시절부터 ‘일제 패망후 소련이 북한에 들어온 것은 공짜 심뽀요 순 억지’라고 배웠는데요, 다른 서방국들도 그런 식으로 가르쳐온 것이죠. 진실이 담겨야 할 ‘역사’에 다른 시각과 경험이 반영되는 건 너무 당연한 데도 우리는 절름발이 역사를 배워온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죠.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2층 중앙홀에 용사들의 희생을 딛고 최후 승리를 거머쥔 것을 표현하는 거대한 입상인데요, 얼핏 ‘배트맨’을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홀 내부 벽면에는 11만 7천명의 훈장 수여자들의 명단이 세겨져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2층 전시실에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부터 일본의 항복문서 등 2차 세계대전 유물들, 1941년부터 독일 나치정권의 침공 당시 사진들도 주욱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시간을 두고 찬찬이 보려면 이틀 정도는 걸릴 것 같았습니다. 대략 훓어본 것만으로도 러시안들에게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전시관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전승기념관 투어를 마치고 나오는 내내, 그리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전시관 홀에 중일갑오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 당시의 일본군의 만행을 담은 사진들을 주욱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는데요,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사진들이었습니다. 검으로 막 목을 내려치는 장면부터, 몸따로 목따로 딩구는 여러구의 시신들 앞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기분좋은 표정으로 찍은 ‘기념사진’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을 주욱 둘러보던 저의 눈을 한참이나 묶어둔 사진이 있습니다. 1894년 갑오 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조선 농민군을 공개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입니다. 그 사진 밑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日本侵略者在朝鮮的暴行(일본침략자재조선적폭행). 일본 침략자들이 조선에서 만행을 저질렀다는 뜻이지요. 장정 허벅지 두께에 어른키 한배 반 정도 길이의 나무로 삼각틀을 만들어 받쳐놓고는 그 위로 같은 두께의 나무를 길게 반대편 삼각틀에 올려 여러명을 매달았는데요, 너무 끔찍하여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양심적인 일본 학자들에 따르면, 일본군은 1894년 11월~1895년 3월 사이에 대살육전을 벌여 처형한 조선인이 5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승기념관을 돌던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요즘 IS다 뭐다 하면서 치를 떠는 분들이 많은데, 일본이 100년도 훨씬 넘는 시절에 이미 IS의 본보기를 보여준 나라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걸핏하면 윗쪽만 쳐다보면서 ‘주적, 주적’ 하는데, 일본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늘 우리의 ‘주적’이었고, 앞으로도 주적이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북한의 핵무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일본의 재무장이고 핵개발이라는 저간의 우려는 새로울 게 없는 건데요, 흰옷입은 우리 조상들이 고난당하는 옛모습을 보니 더욱 일본이 무서워 졌습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가는 곳마다 단체로 견학나온 초중등 학생들로 붐볐고, 모두가 매우 진지한 태도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있습니다. ‘무려 2700만명이 조국을 위해 죽었다’며 그들을 기리고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 나면 실제 군인들보다는 민간인들이, 특히 자신들과 엄마 누나들의 희생이 더 크다는 사실까지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전쟁이 최후의 수단이 될 지언정 ‘평화’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교육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 지성인의 표상인 고 하워드 진 교수가 플로리다 강연에서 역사적 통계치를 근거로 “어떤 전쟁이든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의 80%는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 한결같이 ‘무찌르자 오랑캐’였고, 열강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약육강식의 승리주의 교육이 대세를 이뤄왔는데요, 이런 교육 아래서는 지구촌이 편할 날이 없고 언젠가는 자멸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와 미국 등을 비롯한 열강들이 ‘전승기념’보다는 ‘평화기원’ 행사를 벌이기를 바란다면 너무 세상물정 모르는 얘기일까요?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러시아의 인사동’이라는 아르바트 거리입니다. 20여분 쯤 달리다 보니 유명한 볼쇼이 극장이 보였습니다. 정면 지붕 위에 4두 전차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1776년에 건립된 볼쇼이 극장이 발레는 물론이고 서구 로멘티시즘과 리얼리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담은 오페라와 연극 예술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온 것은 세계인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볼쇼이 공연팀은 한여름 해외 공연을 제외하고는 항상 최고 수준의 공연을 펼친다고 합니다. 한창 전쟁 중이던 때에도 발레와 연극 공연 등 각종 예술공연을 중단시키지 않을 정도로 러시아안들은 문화 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담고 살아왔답니다. 볼쇼이 극장을 뒤로하고 아르바트 거리 입구에 들어서니 어떤 아저씨가 앞뒤로 간판을 두르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여기도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저씨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는데요, 나중에 알고보니 골동품과 고서적을 선전하는 아저씨였습니다. 겨우 몇발자국이나 옮겼을까. 저쪽에서 가방을 앞에두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아저씨, 그리고 바로 곁에는 그림을 파는 아저씨도 보였습니다. 날씨가 좋은 봄이나 여름에는 골목 골목 마다 길거리 예술인들이 즐비하다고 합니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술인은 톨스토이나 토스트예프스키가 아니라 푸시킨이라는군요. 시인이자 소설가인 푸시킨은 우리에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아름다운 싯귀 몇소절을 암송하거나 옮겨 적으며 사춘기를 보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고안해 내며 메마른 러시아어에 새 차원의 혼을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푸시킨은 시, 소설, 에세이, 희곡 등에 열정을 불태워 신고전주의에 이어 러시안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넘나든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투르게네프, 이반 곤차로프, 톨스토이 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푸시킨은 ‘삶에 속아서 노여워 하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요, 그의 최후는 애절하면서도 희극적이기까지 해서 아직도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푸시킨이 29세 되던 어느날, 자신보다 13세나 연하이자 이미 결혼에 실패한 나탈리아 곤차로바에 반해 3년 구애끝에 결혼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경국지색의 미모라는 나탈리아는 낭비벽에 바람끼까지 있어 숱한 염문을 뿌렸고, 황제와도 ‘좋아지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저 뜬소문으로 여기고 모른 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푸시킨은 나탈리아가 황제의 근위병 출신이자 처제의 남편인 단테스 남작과 내연관계라는 소문이 러시아 사교계에 파다하게 번지자 참지 못하고 일을 벌입니다. 그는 연적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1837년 1월 27일 오후 4시경 생페테르부르그 한적한 동네 공터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습니다. 단테스는 팔에 총을 맞았고, 푸시킨은 배에 총을 맞아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틀 후인 1월 29일 오후 2시 45분에 사망합니다. 그가 죽기 전 아이들과 함께 부인이 가지고 들어온 얼음으로 이마를 문지르다 말고 그랬답니다. “잘있어, 친구들!” 그런데 그가 말한 ‘친구들’이란 서재에 키 높이로 둘러 쌓여있던 자신의 저작물을 포함한 책들이었다는군요. 아내와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한 그는 손때 묻은 작품들 속에서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러시아 젊은이의 우상 ‘빅토르 최’의 깊고 슬픈 눈 아르바트 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은 것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 3세 ‘빅토로 최’ 추모 골목입니다. ‘빅토르 최’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오다가다 들은 적은 있지만, 그가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광적일 정도로 추앙을 받아왔고, 아직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현지를 방문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21일 카자흐스탄의 크릴오르다 공화국에서 고려인 2세 아버지(최동렬)와 러시아인 어머니(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림 외에는 잘 하는 것이 없어 학교 공부를 일찌감치 밀쳐두고 노래에만 전념하다, 공장 기숙사에서 난방을 관리하는 화부로 일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 리가의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차를 몰고 가다 의문의 충돌사고로 사망했는데요, 비밀공작조의 소행이라는 풍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리는 공연을 막기 위해 경찰병력이 동원되었을 때 10만 관중이 그를 에워싸며 보호했을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러시안 젊은이들이 5명이나 자살을 했다네요. 생페테르부르그에 있는 무덤에는 그가 즐기던 담배와 꽃을 들고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사망한 8월 15일은 물론, 날씨가 좋은 봄날에는 추모벽 부근이 더욱 북적이고 각종 공연이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러시아 젊은이들은 “오늘 나는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노래한 빅토로 최의 숨결을 아르바트 거리에서 맛보며 자유로운 영혼들의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시간에도 빅토르 최 추모벽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어른들은 물론 10대 청소년들까지 줄을 이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이후 태어났을 것이 분명한 청소년들까지 찾아와서 엄동혹한에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 여행 넷째날은 전승기념관에서 본 동학소년의 공포어린 눈과 아르바트 거리에서 만난 빅토르 최의 깊고 슬퍼 보이는 눈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한 하루였습니다. 우연이었지만, 동토의 이국땅 역사 유적지에서 우리 핏줄들의 숨결을 진하게 느끼게 된 것은 애절하면서도 어떤 과제 같은 것을 안겨준 경험이었습니다. (* 수린 박사의 강의 내용은 통역하신 박종권 부회장님의 요약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박 부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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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ㄱ |
마치 함께 러시아에 다녀 온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남 고문님 지적 감사드립니다. 조사해 보니 '음유시인 블랏 오쿠자바의 기념비'라고 해서 고쳤습니다. 러시아 팀의 조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