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달러의 기적 17] 미주리에서 미시간으로
'8달러의 기적'은 미국 최초로 제3세대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와 유사합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기자 주)
(올랜도=코리아위킅리) 김명곤 기자
미시간 캠프 미니왕카에서 미주리 스프링필드로 돌아온 나는 가을 학기 내내 어떻게 하면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농공학(Agricultural Engineering)을 공부할 돈을 마련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여름방학 기간에 여러군데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한다 하더라도 1년에 2천불이나 드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없어 보였다.
내가 당시 받은 교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지나치게 돈의 액수를 계산하여 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미시간 주립대학으로 학교를 옮길 경우 납부해야 할 1년 등록금 2천불을 벌기 위해서는 특단의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그해 여름에도 미니왕카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친구들과 시카고로 가서 일을 하면 큰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탈북 이후로 하루 두 세 가지 일을 해치우는 것은 내게 일상에 가까웠다. 시카고에 가서 죽기살기로 '2천불 마련'에 부딪쳐 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해 여름 시카고에 가서 제법 급료가 좋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얻었다. 우리가 찾아간 회사는 콘티넨탈 캔 컴패니(Continental Can Company)라는 회사였는데, 자리가 하나 밖에 없었다. 모두들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던 터에 한 친구가 고맙게도 "도원이 형에게 기회를 주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내게 일자리가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전 시간에는 레스토랑에서 4~5시간 접시 닦는 일을 하고 마치자 마자 캔 컴페니로 내달리는 일이 여름 내내 이어졌다. 캔 컴패니에서는 하루 8시간씩 주로 오후 3시부터 조립라인에서 일을 했다. 하루 12시간씩 3개월 가까이 일한 결과, 내 수중에 1천불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큰 돈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1천불을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지 딱히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은사' 캠프 미니왕카 회장님 그러던 차에 윌리엄 댄포스 재단의 여비서관으로부터 서신이 왔다. 평소 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나의 장래 계획과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농공학을 전공하여 고국의 농촌을 돕고 싶은데 미시간 주립대학이 최적지라는 내용과, 등록금 2천불 가운데1천불을 마련했지만 나머지 1천불이 부족하다는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 보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날, 특별 우편이 와 있었다. 우편 봉투를 뜯어 보니1천불 짜리 체크와 함께 메모가 들어 있었다. "미스터 도원에게 : 댄포스 회장은 도원이 미시간 주립대학에 등록하기를 원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이상 대학 비용을 걱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은 미스터 도원의 대학 비용 일체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유학을 오기 직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중학교 시절의 은사이자 바리톤 황병덕 선생님이 선뜻 자신의 첫 월급봉투를 유학비용에 보태쓰라고 손에 들려준 일을 '기억 저장소'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생면부지였던 외국인 청년인 나에게 이런 도움을 베푼 댄포드씨는 말해서 무엇하랴! '보이지 않는 손'은 내가 위기에 처해 비트적 거리고 있을 때마다 누군가를 통해 걸림돌을 제거해 주었다. 나는 돌아가신 댄포스 회장의 배려에 다시한번 고개가 숙여졌고, 반드시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쳐 그의 도움에 보답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드라이 시티'에서 꿈을 꾸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의 후원으로 나는 1956년 가을학기에 미시간 주립대학 농공학과에 등록했다. 미주리 사우스 웨스턴 주립대학에 비하면 미시간 주립대학은 규모 면에서부터 엄청 큰 차이가 났다. 차로 학교 외곽을 한 바퀴 도는데도 30분 정도나 걸릴 정도로 학교 부지가 넓었고, 농대는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의 주립대학들이 출발 당시 농대를 설립하는 조건으로 정부가 무상 또는 헐값에 제공하는 부지에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미시간 주정부가 정책적으로 미시간 주립대학 농대를 집중 지원한 덕분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 기숙사에 둥지를 틀고는 매일 농대 건물까지 20여분간을 달리다시피 해서 수업에 들어 갔다. 학교를 가로지르는 좁은 강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항상 전날 들은 수업 과목 내용을 복기하거나 이런 저런 학업관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듣게된 과목들은 모두가 생소한 내용이어서 너무 힘에 부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한국전을 전후하여 속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지로 애초에 기초가 부실한 처지에서 유학을 왔고, 본격적으로 전공 과목을 영어로 듣고 쓰고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사우스웨스턴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들었던 교양과정은 차라리 애교 수준이었다. 얼마나 수업 내용이 어렵던지 10월 중순께부터 갑자기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미시간 눈발 만큼이나 혹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장실에서도 길을 가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할 정도로 공부에만 몰두해야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먹을 시간이 없어서 도넛츠를 입에 문 채로 오물거리면서 넒은 교정을 가로질러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시간 주립대학을 품고 있는 이스트 랜싱이라는 도시는 한마디로 '드라이 시티'였다. 가끔 가을철 풋볼 시즌에 풋볼 구장 둘레의 넓다란 잔디에서 차 뒷문을 열어놓고 테일게이트 파티가 벌어지며 떠들썩 하기는 했지만, 학교 내에서는 물론이고 시내에서 조차도 술을 팔지 않았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은 주말에 시 외곽 다른 도시로 빠져 나가서 맥주 파티를 벌이곤 했다. 차가 없었던 나는 시내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었고, 수업을 따라가기에도 바빠 농대 건물과 기숙사만 왔다갔다 했다. 첫 학기에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도시 밖으로 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당시 한인 의사 닥터 치 (DR. Chie)가 운영하던 작은 병원에 가서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추가 경비가 더 들어갔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댄포스 재단의 도움만을 기개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어느덧 이력이 붙어 있던 탓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5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던 탓에 종종 바베큐 파티에 참석하여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나는 미시간 중부의 '드라이 시티'에서 공부로 젊음을 불태우며 피폐한 고국의 농촌을 생각하며, '모두를 잘 먹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갓 24세, 나의 젊음은 농학의 신비한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재구성 : 김명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