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전문가들은 전 세계 부유한 국가들이 백신 배분 불평등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오미크론에 이어 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출현할 위험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한 백신접종 현장. 사진 : ABC 방송 뉴스 화면 캡처
국가간 백신접종 비율 격차 갈수록 늘어나, 일부 지역 국가의 ‘빈곤 악화’ 우려
라 트로보대학교 공공보건 전문가, “백신 무력화 하는 새 변이 나올 수도” 경고
지난 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 보고된 COVID-19의 새로운 변이인 ‘오미크로(Omicron)'으로 인해 각국이 방역대책을 재고하고 있다. 각국 연구진은 이 변이 바이러스의 전염력, 심각성, 백신에 대한 영향 등을 파악 중이다.
현재까지 SARS-CoV-2의 새 변이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불분명하다. 초기 증거에 따르면 이미 출현한 다른 변이에 비해 더 많이 전염시킬 수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도 새로운 감염자 급증을 촉발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내놓은 상태이다.
현재 접종받고 있는 COVID-19 백신이 (감염에 따른) 심각한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보호해 준다면(현 단계에서는 그럴 것으로 보인다), 선진국의 백신접종자들은 일단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 사이의 백신접종률 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오미크론’ 변이는 전 세계에 다시금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호주에서도 오미크론 감염자가 속속 확인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달 마지막 주, 라 트로보대학교(La Trobe University) 공공보건 전문가인 데보라 글리슨(Deborah Gleeson) 부교수는 호주 비영리 학술 매거진인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기고한 칼럼에서 국가간 백신접종 비율 격차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런 격차가 바이러스와 관련해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우려했다.
전 세계 국가의 백신접종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낮은 접종률을 보여준다. Source : Our World in Data
글리슨 부교수는 각국 정부가 이런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는 추가로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이런 새 변이들 가운데는 현재 나와 있는 백신을 무력화하는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했다.
전 세계 지역별 ‘COVID-19
백신 접근 불평등’
지난 달(11월) 말까지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최소 한 차례 COVID-19 백신을 접종받는 비율은 약 54.2%이다. 하지만 저소득 국가의 경우 그 비율은 5.8%에 불과하다.
그런 한편으로는 고소득 국가와 중상위 소득 국가, 다른 한편으로는 저소득 국가간 예방접종 범위 격차는 특히 극명하다.
고소득, 중간소득 및 저소득 국가별, 100명 당 COVID-19 백신 접종량. Source : Our World in Data
아프리카 국가들의 예방접종률은 더욱 우려된다. 전 세계에서 약 40개 정도 국가의 백신 완전접종률이 아직도 10% 미만인 상태이며, 이 국가들 대부분이 아프리카에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사태가 시작된 이후 전 세계 전염병 전문가들은 COVID-19 백신의 불평등한 유통을 경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심각하게 남아 있다.
‘COVAX’의 약속 이행 실패
전 세계 백신접종률 격차의 첫 번째 이유는 COVID-19 백신 구매 및 유통을 위한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가 출범한 이후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코백스 퍼실리티(이하 코백스)란 WHO-감염병혁신연합인 CEPI-세계백신면역연합인 GAVI가 중심이 돼 운영하는 국제 백신 공동 구매 및 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를 말한다.
2021년 11월 29일을 기준으로 백신접종률이 가장 높은 국가와 가장 낮은 국가의 비교 그래프. Source : Our World in Data
전 세계 거의 100개 저소득 국가가 바로 이 백신 프로그램에 의존하고 있다. 코백스는 초기에 2021년 말까지 개발도상국 중에서 고위험군에만 백신을 접종할 수 있도록 20억 도스 제공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지난 9월 들어 전달하고자 하는 예상치 백신이 14억2,500만 도스로 바뀌었다. 게다가 11월 말까지 실제로 전달된 백신 양은 5억7,600만 도스뿐이다.
이 같은 예측 가능한 실패는 주로 부유한 국가들이 사전 구매계약을 통해 개발된 첫 백신 75억 도스 중 절반 이상을 쓸어가고, 코백스에는 부스러기만 남기기 때문이다.
코백스에 대한 적은 투자(백신 용량 및 기금 측면에서), 여기에다 부스터샷(booster shots)을 위해 부유한 국가에서 백신을 추가로 비축하는 것은 당장 도움이 필요한 국가에 공급할 코백스의 백신 확보를 어렵게 했다.
각 국가별로 약속한 코백스 기금 제공 불이행
백신 개발이 한창일 때 부유한 국가들은 저소득 및 중간소득 국가에 지원할 백신 비용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 중 일부는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공평한 백신 분배를 취지로 WHO-CEPI-GAVI가 중심이 돼 운영하는 국제 프로젝트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는 운영기금 및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은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 도착한 COVAX 제공의 COVID-19 백신. 사진 : ABC 방송 화면 캡쳐
지난 10월 25일까지 13억 회 접종 가능한 백신이 약속되었지만 실제로 전달된 백신의 양은 약 10%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 가운데 많은 고소득 국가들은 접종률이 낮은 국가들이 어느 정도 접종을 받을 때까지 추가접종(booster shots)을 보류해 달라는 WHO의 요청을 무시했다. ‘국경없는 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 Doctors Without Borders)는 백신 격차와 관련해 ‘올해 연말까지 10개 부유한 국가는 추가접종을 하고도 8억7천 만 회 이상의 백신 양을 더 보유할 것’으로 추정했다.
호주만 보더라도, 인도-태평양 지역 개발도상국에 6천만 도스의 백신 제공을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실제 전달된 양은 930만 도스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용량 중 코백스를 통해 공평하게 분배될 예정인 것은 없으며, 아프리카 국가를 위한 백신도 없다.
반면 호주 정부는 호주 국민을 위해 2억8,080만 도스의 백신 사전 구매계약에 8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이는 호주 국민 1인당 10회 이상 백신을 투여받을 수 있는 양이다.
부유국들, ‘백신기술 독점 일시 중단’ 제안에 ‘반대’
뿐만 아니라 일부 부유한 국가들은 COVID-19 관련 건강 제품 및 기술에 대한 제약회사의 ‘독점’을 보호하는 무역 규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자는 제안에 계속 반대를 표했다.
2020년 10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처음 제안한 ‘TRIPS 면제'(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waiver)는 각국 기업이 특정 기업의 지적 재산권 침해 가능성에 대한 소송을 두려워하지 않고 COVID-19 관련 기술을 사용하여 제품을 생산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각 국가별로 백신 마련을 위해 COVAX에 기부하기로 약속한 금액과 11월 말 현재까지의 기부 현황. Source : Our World in Data
‘TRIPS 면제’는 현재 전 세계 63개 국가가 공동 후원하고 있으며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 164개 회원국 가운데 100개 이상 국가가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5월 ‘TRIPS 면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공식적으로 이 제안을 공동 후원하지는 않았다. 반면 유럽연합(EU), 영국, 스위스는 계속 반대해 왔으며 독일은 특히 강하게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다.
현재의 63개 국가 후원 형식으로 ‘TRIPS 면제’가 채택된다면 그 대상에는 COVID-19 백신, 치료제, 감염진단 기기, 의료기기 및 개인보호 장비를 비롯해 COVID-19의 예방 및 치료, 바이러스 억제에 필요한 모든 건강제품과 기술이 포함된다.
특히 비공개 정보(규제 기관에 제출되거나 영업 비밀로 보호되는 정보), 저작권 및 산업디자인에 적용되는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TRIPS)에 관한 WTO 협정 규칙이 면제된다. 또 기간은 면제가 채택된 날로부터 3년간 지속되며 이후 매년 검토된다.
하지만 ‘TRIPS 면제’가 제안된 지 1년이 넘었지만 WTO의 논의는 현재 고착 상태로 남아 있다.
라 트로보대학교 공공보건 전문가인 데보라 글리슨(Deborah Gleeson) 부교수. 비영리 학술 전문지 <The Conversation>에 기고한 칼럼에서 전 세계 백신 불평등 문제를 지적한 글리슨 부교수는 저소득 국가들의 백신접종률 제고를 위한 각국의 노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 Global Development Policy Centre
EU는 강제 인허가(compulsory licensing. 특허 보유자의 허가 없이 특허의 주제를 이용하는 것)를 허용하는 ‘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의 기존 조항을 수정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백신 제조를 위한 비공개 정보는 포함되지 않는다.
호주를 포함해 영국, EU 등 많은 국가는 현재 WTO에서 수출 제한 및 관세 절차와 같은 무역 관련 문제를 다루는 별도의 제안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COVID-19 관련 제품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는 지적재산권은 해제하지 못하고 있다.
“아주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글리슨 부교수는 현재 전 세계 백신 배분의 불평등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부유한 국가들은 백신을 비축하고, 코백스의 기금 및 백신확보를 어렵게 하고, 약속한 기금 제공을 아주 천천히 제공하고, 개발도상국에서의 광범위한 백신제조 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글로벌 합의를 지연시키고 있다”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어 그는 “우리(전 세계 국가)는 더 잘 대처해야 한다”라면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 각국이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강조했다. COVID-19에 대한 지구촌 전체의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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