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주립대 풋볼 개막 의식도 오시올라, 카운티 이름으로도 남아
창을 던지는 기수는 사실은 1830년대의 가장 유명한 아메리칸 인디언이자, 플로리다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명인 '오시올라(Osceola)'를 나타내는 것이란 설이 있다. 플로리다에서 오시올라 명칭은 카운티, 국유림, 학교, 거리, 호수 그리고 심지어는 쇼핑센터 등 여러 장소의 명칭으로 올라있다. 인물 이름으로 따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선택되고 있다. 오시올라의 명성은 그의 복합적인 성장배경과 함께 용맹스런 인디언 전사 수장으로서의 활약으로 신비함까지 더해지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시올라는 1804년 앨라배마주에서 빌리 파월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또는 계부)는 스캇티시(스코틀랜드인)와 아프리칸 피를 받을 영국 무역업자 윌리엄 파월이었다. 그는 10살 때 크릭족 인디언인 어머니 폴리 코핑거와 함께 피난민으로 플로리다로 왔다. 소년 시절에 크릭 족의 강력한 지도자 피터 맥퀸의 교훈에 영향을 받은 10대 빌리 파월은 '아시-야홀로(Asi-yaholo)'라는 인디언 이름을 선택했다. 이 이름의 영어식 발음이 오시올라이다. 이름 첫부분인 '아시'는 짙은 색의 카페인이 풍부한 차를 의미하며 오랫동안 예식이나 전쟁 준비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빌리 파월은 이름처럼 전사가 됐다. 1835년 말, 그는 소수의 세미놀 전사들을 모아 세미놀 족을 서부로 옮기는 임무를 맡은 연방 요원 와일리 톰슨을 사살하는 공격을 이끌었고, 같은 날 센트럴플로리다 서쪽 부쉬넬 근처에 있던 프랜시스 데이드의 부대를 매복 공격했다. 이는 플로리다 역사의 한 주요부분인 제2차 세미놀 전쟁에 불을 지폈다. 세미놀 전쟁에서 백인 토마스 제섭 장군은 백기를 들었고,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신비한 이름 '오시올라', 문화적 가치로 승화 이같은 상황은 오시올라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신비한 인물로 떠올렸다. 일례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라는 유명소설을 쓴 덴마크 작가 카렌 블릭센은 자신의 첫 작품을 쓸 때 오시올라라는 이름으로 썼다. 심지어 오시올라는 세미놀족인 찰리 에마슬라까지 죽였다. 에마슬라가 연방정부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여 결국 세미놀족이 플로리다를 떠날 수 밖에 없도록 했다는 것이 살해 이유였다. ` 1837년 10월 오시올라는 포로로 잡혔고, 그와 다른 전사들은 세인트 어거스틴에 잠시 수감된 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포트 몰트리(Fort Moultrie)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이미 말라리아에 걸린 상태였다. 오시올라의 마지막 날들은 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 존재였는 지 보여준다. 예술가들은 그의 생전 모습을 보아두려고 미 국방부의 허락을 받아 포트 몰트리로 왔다. 이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메리칸 인디언인 화가 조지 캐틀린이다. 캐틀린은 1838년 1월 17일 포트 몰트리에 도착했고 같은 달 30일 오시올라가 세상을 뜨기 전 가까스로 그림을 마쳤다. 이 때 그린 그림이 현재 스미스소니언에 소장돼있는 유명한 '오시올라 초상화'다. 오시올라는 포트 몰트리에 묻혔는데, 무덤속 그의 시체에 머리가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은 1960년대 후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오시올라의 담당 의사는 프레드릭 위든으로 살해된 연방 요원 톰슨의 처남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오시올라가 매장 되기전에 위든이 몰래 오시올라의 머리를 잘라냈다고 전한다. 위크먼의 1991년 저서 <오시올라의 유산>에서 오시올라의 머리 소유권이 1840년대에 뉴욕시 의과대학의 유명인인 발렌타인 모트 박사에게로 넘어갔을 지 모른다는 문서를 인용하고 있다. 모트 박사가 대학에서 관리하던 박물관은 1866년 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됐다. 한편 오시올라의 이름을 딴 오시올라 카운티는 올랜도에서 남쪽으로 18마일 거리에 있으며, 디즈니월드와 인접해 있다. 최근에는 카운티 정부의 '네오시티' 조성에 한국 기업이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지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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