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칼럼] 윤 후보에 가슴 철렁, 한방에 훅 간 정치인 떠올린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자, 여기들 좀 보세요, 지금 내 손에 들린 이것이 뭔지 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인 1950년 2월, 웨스트 버지니아 휠링의 한 여성단체가 주최한 연설회에서 한 남성이 문서를 손에 들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가 손에 든 문서에는 소련 스파이 노릇을 하는 빨갱이 국무부 관리 205명의 명단이 적혀있었다.

'나비효과'를 불러온 불온한 역사의 서막은 이름없는 작은 동네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바람을 일으킨 이는 위스콘신 출신 상원 의원 조셉 매카시였다.

1,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미국이 패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치열한 세력전을 펼치고 있던 차에 소련 스파이 빨갱이가 미국 행정부의 심장부에 득실거리고 있다니… 두 번의 큰 전쟁에서 자식 잃고 남편 잃은 일반 미국민들에게는 경악할 일이었다.

매카시의 빨갱이 명단은 당시 미국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계, 학계, 산업계, 예술계 등에까지 엄청난 회오리를 일으켰다. 이 회오리가 퍼져나간 경로를 보면, 어떤 국가적 위기의식 앞에서 집단사고(集團思考)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고, 그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이성적 존재가 되는지 알게 된다.

이같은 경로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좀더 풀어 보기로 하자.

괴이하게도 매카시가 말하던 빨갱이 혐의자들의 면면과 숫자는 시간이 지나며 오락가락 했고, 심지어 그 명단이 어떤 경위를 통해 작성되고 입수되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파장은 일파 만파로 번져가기만 했다.

극우 정치인들과 언론은 당시 경력 조작, 불법 금품수수, 음주추태, 명예훼손 등으로 위기에 몰려 있던 매카시의 정치적 속셈은 눈감은 채 오로지 ‘폭로’에만 집중하여 부풀리기 시작했다. 매카시가 제시한 주요 인물들의 혐의 가운데 일부는 상원 조사관들에 의해 곧 사실무근으로 밝혀지기도 했지만, 애국심에 충만해 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증거'가 필요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빨갱이 소동의 여파로 육군장관 로버트 스티븐스가 사임했는가 하면, 트루먼의 심복 애치슨 국무장관은 위험 인물 1호로 지목되었고, 40년대 원자폭탄 제조를 지휘한 오펜하이머 박사마저 스파이 혐의자로 몰려 처벌을 받았다. 오펜하이머의 '빨갱이 혐의'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작은 공구상 운영자에 불과한 로젠버그 부부가 스파이 혐의로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소설 속 부자 재산 빼앗은 로빈 후드는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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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카시 광풍에 휩쓸려 전기의자에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 ⓒ 위키피디어
 
빨갱이 사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른바 공직자의 사상을 검증한다며 1947년에 만들어진 '충성도 심사 프로그램(loyalty test)'을 가동하여 수많은 공무원과 교수들을 검거했다. 필자가 알고 지내던 미국인 노교수는 "모든 분야에서 공포 분위기가 미국을 휩쓸었던 시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심지어는 연예인들까지 검거했다.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극작가 아서 밀러,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이때 곤욕을 치렀다.

디즈니 랜드 설립자 월트 디즈니는 동료를 고발하고서야 의혹의 눈길에서 벗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도 빨갱이 딱지가 붙여져 스위스 등지에서 무려 20여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에덴의 동쪽> 등 여러 명작으로 유명한 엘리야 카잔 감독도 한때 빨갱이 의혹을 받았다.

당시 빨갱이 사냥은 실존 인물을 넘어 문학 작품의 가상 인물까지도 대상에 올려졌다. 남녀노소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소설 속 인물 '로빈 후드'가 빨갱이를 영웅화한 것이라는 기막힌 해석도 나왔다.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로빈 후드의 행동은 마르크스 철학을 상징화한 것이란다.

<말타의 매>로 잘 알려진 험프리 보가트는 당시의 상황을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데 엉덩이를 긁적인 사람은 모두 빨갱이 혐의를 받았다"고 익살스럽게 묘사했다. 말도 안될 것 같은 일이 당시엔 말이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이때의 빨갱이 소동을 가리켜 '20세기 최대의 스캔들'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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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매카시 광풍이 불며 ‘빨갱이’로 낙인 찍힌 전설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 ⓒ 브리태니커
 
그런데 이처럼 기세를 부리던 빨갱이 소동은 싱겁게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붉은 세력을 막아낸다는 명분으로 치른 한국전쟁을 거치며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매카시가 미 군부까지 공격하다 오히려 덜미가 잡히게 된 것이다.

1954년 4월 TV로 생중계 된 가운데 열린 36일간의 '육군-매카시 청문회'는 그가 지목한 빨갱이들의 무혐의를 입증해낸 재판정이 되었다. 이에 앞서 3월 9일 매카시는 CBS의 전설적인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가 진행한 <시 잇 나우>(See It Now)라는 인기 토크 쇼에서 조목조목 비판을 받은 터여서 청문회에 대한 미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청문회를 시청한 미국인들 사이에 두고 두고 회자되는 유명한 논쟁이 있다. 청문회 막바지에 벌어진 이른바 매카시-웰치 논쟁이다. 청문회가 열린지 30일째 되던 날, 매카시는 육군 내부에 빨갱이가 우글거리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이번엔 조셉 웰치 육군 법률고문에게 태클를 걸었다.

비미활동위원회(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를 이끌고 있던 매카시는 웰치가 젊은 시절 좌파 법률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프레드 피셔라는 변호사를 후원해 왔으니 웰치도 빨갱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색맹 증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졌고, 젊은 시절 일도 오늘의 일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에 빠져 있던 매카시에게 피셔나 웰치나 모두 빨갱이였던 것이다. 그는 청문회 내내 혐의자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고함을 지르거나 협박하는 태도로 일관했고, 그의 주장에 의아심만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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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조작되고 왜곡된 자료를 통해 미국과 전세계에 빨갱이 광풍을 일으킨 조셉 매카시 의원(오른쪽)의 의회 청문회 광경. ⓒ 브리태니커
 
광란극에서 깨어난 미국민들... 좀비가 된 매카시

드디어 웰치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웰치는 부드러우면서도 냉철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거센 폭포수를 거꾸로 올라가는 한마리 물고기와 같았던 그의 반격은 동료 의원들과 미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워낙 광풍이 드셌던 터라 숨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그의 말 하나 하나를 콕콕 찍어 듣고 있었다.

"미스터 세네터(상원의원), 나는 당신이 새파란 젊은이에게 그런 상처를 줄 만큼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가 당신에게서 받은 상처를 평생 짊어지고 살게 될 것을 생각하니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나 스스로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신사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군들 당신을 용서하려 들겠습니까."

얼굴이 벌개지며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매카시에게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웰치는 다시 속사포처럼 퍼부었다.

"미스터 매카시, 정치적 살인행위를 그만 중단하지 않으시렵니까? 당신은 할 만큼 했습니다. 당신은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습니까? 도대체 인간에 대한 센스 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까?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도, 당신이 내세운 명분도 결코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매카시가 우물우물 뭐라고 반박하려 들었으나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유유히 회의장을 걸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 미국을 수 년 동안 불안과 공포, 불신 속에 잠기게 했던 '괴물'의 면전에 대고 속시원한 소리를 내뱉은 신사에게 보내는 기꺼운 지지의 박수였다.

청문회 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미국민들도 막판에 벼락같은 결정타를 가한 웰치에게 박수를 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에 역사비평가들은 당시 청문회 기간 동안 추리고 추려서 간첩으로 지목된 159명 가운데 '의혹'이 있는 사람은 '우연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준'인 단 9명에 불과했다고 적었다.

매카시는 청문회에서 자신의 병역 조작과 여러건의 개인 비리까지 밝혀져 되려 견책을 당했고, 3년 뒤인 1957년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하직했는데, 당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50년대 매카시 광풍은 자신의 과오를 숨기고 정치적 야망에 들떠있던 한 '색맹' 환자가 엮어낸 막장 드라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선동성 강한 이 드라마는 시류를 탄 언론의 협조로 마녀사냥식 집단사고(集團思考)를 만들어 냈고, 미국 사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뒤틀며 광란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문제는 이 광란의 역사는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죽었는가하면 살아나고 또 살아나는 좀비처럼.

아직도 '멸콩의 횃불'을 부르는 사람들

최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공개적 ‘고백’과 더불어 느닷없는 ‘멸콩’ 구호로 세상을 들썩이고 있는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행태를 보고 다시 깊은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아득한 시절 훈련소 초입에서부터 들었던 그 노래, 도대체 우리땅에서 언제까지 '멸공의 횃불'을 들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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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 신세계그룹 제공
 
1960년대 경기종목을 21세기 올림픽 종목에 끼워넣자고 우기는 것과 흡사한 정용진 부회장의 멸콩 발언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대기업 장사꾼이 가져야 할 실용주의적 태도와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 경제 상황에서 중국과 베트남 등 사회주의 무역국들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10대 교역국 가운데 중국은 압도적 1위(25.8%)이고, 미국이 2위(14.5%), 베트남이 3위(9.5%)를 차지하고 있다. 두 사회주의 국가의 대한 무역 비율이 3분의 1일을 넘는다.

아니나 다를까. 홍콩의 유력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정 회장의 발언을 보도하면서 중국 현지에도 알려지게 됐고, 신세계의 중국사업 리스크가 부각되자 외국인과 기관이 신세계 주식을 대거 팔아치우는 바람에 시가총액 2천억이 날아갔단다. 정 회장의 ‘용맹’이 가져온 자업자득이다.

중국의 등소평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주장한 지가 40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 새해 벽두부터 먼 이국땅에서 대기업 총수가 벌인 매카시 굿판 소식을 듣는 맛은 무척이나 씁쓸하다.

역사의식 없는 대기업 총수의 행태는 그렇다 치자.

현재 선진 대한민국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영구적인 선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할 일은 전쟁 걱정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가꾸는 일이다.

까마득한 박정희 시절의 7.4 남북공동성명은 차치하고라도, 1988년 7.7선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의 10.4 공동선언, 가장 최근인 2018년의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 등 지난한 화해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현재는 수년 동안 논의돼온 종전선언이 결실을 앞두고 있고, 평화협정으로 이어질 지도 모르는 찰나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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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트에서 장을 보며 "여수멸치"를 구입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나경원 전 원내대표. ⓒ 윤석열, 나경원 SNS 캡처
 

이런 판에 유효기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멸콩’을 카트에 담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대선 후보엔 가슴이 철렁한다. 이제는 조지 W. 부시를 흉내낸 '선제타격'까지 주장했다니 소름이 돋는다. 근거 없는 엉뚱한 선제타격으로 수 십 만명의 이라크인들을 살상한 역사를 정녕 모르고 한 소린가?

 

나경원 전 의원,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멸콩 연대’는 또 뭔가. 아무리 정치적 목적이라 하더라도 국민의 안위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다면 그래서는 안 될 일이다. 대체 밑도 끝도 없는 이념 대결로 ‘킬링필드’를 경험한 한반도 땅에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불러올 심산인가.

이들에게 70년 전에 조셉 웰치가 토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미스터 OOO, 제발 정치적 매표행위를 중단하지 않으시렵니까? 당신은 할 만큼 했습니다. 당신은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습니까? 인간에 대한 센스 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까?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도, 당신이 내세운 명분도 결코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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