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마간다통신] 장익진 기자= 30년 전 1986년 2월 26일, C`130 수송기에서 골프 모자에 자켓 차림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검은 드레스의 아내 이멜다와 장녀 아이미 장남 봉봉, 참모 총장 베일 부부트랙에서 내렸다. 히비스커스의 레이를 가한 때, 페르디난드는 위엄을 나타내는 것처럼 조금 똑바로 했지만 그 모습은 21년간 비정한 독재를 계속한 권력자의 모습은 없었다.
그 이틀 후, 페르디난드는 기지의 장교 클럽에서 기자 회견을 했다. "필리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유혈참사를 피해 미국의 설득에 따라 망명을 결정했다"고 성명을 낭독하고 질문은 받지 않았다. 옆의 이멜다가 눈물을 닦고 있었다. 배부된 자료에는 "대통령 집무실보다"라고 머리말이 붙어 있었다. 페르디난드 마지막 공식 기자 회견이었다.
2월 25일 아침, 필리핀 마닐라 수도권 엗사 거리 '피플 파워 기념물'에서 '혁명'3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매년 이 날은 공휴일이다.
필리핀은 지금 6년에 한 번 대통령 선거를 포함한 통일 선거가 실시된다. 봉봉은 부통령에 출마하고 있다. 여론 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독재자의 아들"을 헤아리는 세력으로부터는 "마르코스 시대는 좋았다. 질서가 있고, 인프라 정비도 진행되고 있었다」라고 하는 소리가 활발하게 들려온다. 이날 아키노 대통령은 행사장의 연설에서의 인사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쫓겨난 마르코스 일가가 귀국하는 것 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5년 후 귀국해 1995년에는 이멜다가 하원 의원에 당선하여 일가 정계에 복귀했다. 이멜다는 지금도 하원 의원, 아이미는 북쪽 일로 코스 주지사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일족의 선거구는 주로 페르디난드의 지지기반 이었다. 북 일로 코스와 이멜다의 출신지 레이테에 한정되어 있었다. 봉봉은 지금 전국구 상원 의원이지만, 이는 24명 중 1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통령은 전국에서 1명만이 선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코스 일가에게 지금까지와는 의미가 다르다.
봉봉의 부통령 출마를 놓고 이멜다는 "왜 대선이 아닌가"라고 탄식했다고 하지만 필리핀 부통령은 실권이 없다. 미국처럼 正`副통령이 같은 당에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직 비나이 부통령처럼 대통령의 반목이라고 입각에서 밀려나 중요한 일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이 부재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에스트라다 피플 파워 2에서 축출했을 때, 아로요 부통령이 승격 한 후 10년간 정상의 자리에 눌러 앉았다.
봉봉과 팀을 이루어 대선에 출마한 상원 의원 미리 암 산티아고는 "만약 내가 뭔가 있어도 괜찮아. 확고한 젊은 후계자가있다"고 자신의 건강 이상설을 역이용 봉봉을 들고 있다.
북부 일로코스 지사의 아이미는 역시 대통령에 출마하고 있는 상원 의원 그레이스 포와 2월 11일에 현지에서 회담했을 때, "마르코스 톱 2라는 것은 어떨까"라고 농담을 했다 .
대통령 후보의 두테르테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페르디난드의 영웅 묘지에 안장을 인정한다"등의 발언을 하고 있다. 하와이에 매장되어 있는 페르디난드의 시신을 필리핀으로 가져가는 것은 이멜다의 꿈이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허용하지 않는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필리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기록에 남는 성적을 남겼지만, 그런 날카로움은 느끼지 않는다.
이번 선거는 부자의 인기 성과에 대한 평가를 넘어, 필리핀이 마르코스 시대를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지, 86년의 '혁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지표의 의미가 있다.
국민적 작가의 쇼닐 호세는 근현대사에 관한 필리핀의 자세를 "짧은 메모리"라고 평한다. 미국의 식민지 전쟁 중에 일본의 만행, 그리고 계엄령 하에서 고통에 대해서도 .......
단순히 건망증인지 마르코스 시대를 재평가하고 있는가? 혹은 86년의 '혁명'이후 역대 정권의 변함없는 부패, 비효율 체질에 실망이 과거의 미화에 연결되어 있는지.
봉봉 캠페인과 그 결과는 이번 선거의 볼거리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