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칼럼] 안 후보는 4시간 달려와 '소신표'를 던진 동포의 심정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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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를 위한 재외투표가 25일 오전 8시부터 27일 오후 5시까지 애틀랜타총영사관 올랜도재외투표소에서 실시됐다. 사진은 올랜도 재외투표소 입구에 세워진 선거 안내판. ⓒ 김명곤
 
(올랜도=코리아위클리) 김명곤 기자 = 미국에서 동포 신문일을 하는 저는 요즘 심사가 복잡합니다. 아뇨, 허망하고 가슴 한 곳이 뻥 뚫린 기분입니다. 왜냐구요?

마치 패농한 농사꾼 같은 요즘의 기분을 안 후보님께 전하려 합니다.

오래전 유학생 시절에 저는 '배추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대학 농대에서 시험농장을 쪼개서 서 너 가지 채소를 심게 해 주었는데요, 지친 유학생들에겐 스트레스 풀기 딱 좋은 소일거리였습니다. 어느해인가 시험삼아 배추농사를 지었는데요, 생각보다 탐스럽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등하교길에도 빠지지 않고 '농장'에 들러 물을 주었고, 어렷을 적 보았던대로 포기가 막 차오를 무렵에는 노끈으로 묶어주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는 배추벌레도 잡아 주었고요. 서늘한 가을철 통통하게 포기가 차오르며 가슴도 함께 차올랐습니다.

한 두어 주쯤 후에 '김장'을 하는 꿈을 꾸며 이른 아침 텃밭을 나갔는데요, 이게 왠일입니까. 배추밭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밤새 누군가 20여포기의 배추를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날카로운 칼로 모두 잘라간 것입니다. 너무 허망하여 밭두렁에 주저앉아 여기 저기 널부러져 있는 배추꼬리와 휑하게 빈 밭을 바라보자니 코끝이 시끈해져 왔습니다. 문득 패농으로 목숨을 끊은 어렷을 적 고향 동네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 기간에 4시간 거리 마이애미에서 투표하러 온 부부의 얼굴을 잊지 못합니다. 40대 후반이라고 밝힌 남성과 그의 아내입니다. 투표를 막 끝내고 상기된 얼굴로 나온 이분들에게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편이 웃음띤 얼굴로 “정쟁으로 소모적인 양당제 없어져야 합니다. 참신한 이미지의 인물을 선호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팔짱을 낀 채 웃기만 하던 부인이 "여보!"라며 말리지 않았으면 '안철수'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찰나였습니다.

제가 사흘 동안 인터뷰를 한 30여 명의 투표자들 가운데 비슷한 답변을 한 분들이 제법 있었는데요, 이 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신투표를 위해 장거리를 달려왔기 때문이었고, 당당한 그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안 후보가 당선되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투표장을 찾은 것입니다. 저로서는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스비도 가스비려니와 왕복 8시간을 달려서 떨어질 후보를 위해 투표하러 오다니요.

저는 지난 3일 새벽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고 윤석열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 부부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들의 '안위'가 염려되기까지 했습니다. 배추 20여포기를 도둑맞고 가슴이 아려 눈물을 글썽일 사람도있고, 패농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을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특정 정치 이념이든 '타아'에 '마음을 준다'는 것, 소박하지만 자신만의 뭔가를 누구와 함께 가꾸어 간다는 것,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원초적 심성이 아니던가요?

저는 엘리트로 꽃길만 달려온 안 후보가 '상심'한 작은자들의 심정을 알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해외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고국의 안녕을 빌고 있는 재외국민들이 대선에서 느닷없이 철수하신 안 후보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상당히 깊고 길게 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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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오전 8시부터 27일 오후 5시까지 애틀랜타총영사관 올랜도재외투표소에서 실시한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에서 일착으로 투표를 마치고 나온 최모(62)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명곤
 

갑자기 유턴한 유명 목사 떠올리게 한 안철수의 '철수'

언젠가 빈민운동, 반독재 투쟁에 이어 민족화해를 외치며 북한을 드나들던 어떤 목사님이 느닷없이 '극우'로 급회전을 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 분의 신앙고백과 세계관을 존중하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 '황당함'과 '예의 없음'에 분노로 몸을 떨었던 일도 어제일처럼 기억납니다. 푸른 꿈을 간직한 수많은 기독 청년들, 교수, 의사도 뜻을 함께하겠다며 나선 사람들도 있었고, 연탄 배달로, ㅤ삯바느질로, 손톱 다듬는 일로 헌금을 한 분들도 부지기수 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분이 납득할 만한 신앙고백적 해명도 없이 '뉴라이트'로 유턴(u-tern)을 하자 어떤 기독교인이 이런 말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000 목사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 본시 신앙적 신념이란 것이 삶과 생을 송두리째 바칠 만큼 무게가 엄청난 것임을 000목사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설교'라는 일방적 무기를 통해 상심한 사람들의 상처를 헤집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에도 현 정부와 특정 후보를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로 지칭하는가 하면, 윤 후보의 선제타격 주장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지난 다섯 차례의 대선 토론을 보며 안 후보님이 예전보다 훨씬 여유있고 안정된 모습으로 토론을 끌어가는 것을 보고 '깜'으로 여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상대 후보의 질문에 상관없이 되는대로 쏟아내는 후보가 있었기에 돋보였는지 모릅니다. 제 주변에서도 안 후보님을 '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 분들이 많았고, 실제 재외투표장 앞 인터뷰에서도 그런말을 하는 분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안 후보님의 상세한 공약들은 제껴두고 '다당제'에 대한 소신은 저에게도 제법 설득력이 컸습니다. 분단상황에서 경제든 정치든 중간지대나 경계지대가 없어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낼 공간이 없어져 버린 현실에 대한 분석과 나름의 대안은 귀 기울일만 했습니다. 피아 구분법만을 익혀 정쟁으로 하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여의도 정치판에 새 바람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바람도 돋아올랐습니다. 통합의 정치철학에 테크노 마인드가 가미된 지도자라며 십 수년 이상 안 후보님만 지지해온 저희 형님과 조카의 말이 헛소리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자고 일어나보니 안 후보님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수시간 전만 해도 통합의 정치를 외치며 다당제를 주장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분이, 멸콩과 선제공격을 주장하고 정치보복을 노골적으로 외치던 분과 양손을 치켜들고 승리를 외치는 장면은 생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만인의 선택 앞에 선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지지자들에게만은 왜 단일화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득하는 공적인 과정이나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제 안 후보님께서 선거일까지 수일 동안 주먹 쥐고 구호를 외치고, 설득하려 들지라도 허공을 때리는 허깨비의 목소리로 들려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안철수는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한 입으로 두 말하는 또 한사람의 그저 그런 표리부동한 정치인을 목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소신을 갖고 소박한 꿈을 꾸어온 소자들의 등에 예리한 비수를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이 감행한 2022년 3월 3일 새벽의 철수, 우리는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겠습니다. 먼길 달려와 안 후보에게 '헛표'를 던진 동포 부부의 심정으로 가수 김민기의 노래를 전합니다. 덧붙여, 서울 사는 저희 형님과 조카가 안철수 후보님으로부터 과감하게 '철수'했다는 소식도 전해드립니다.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

무궁화 꽃 피워 꽃밭 가득히
가난한 아이의 손길처럼

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꽃피우던 아이도 앓아 누웠네
누가 망쳤을까 아가의 꽃밭
그 누가 다시 또 꽃피우겠나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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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오전 8시부터 27일 오후 5시까지 애틀랜타총영사관 올랜도재외투표소에서 실시한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에서 2시간 거리에서 온 유학생들이 투표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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