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서관은 수천 년 동안 발전을 거듭하고 시대 변화에 맞춘 서비스로 지역사회와 연관을 맺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 : Pixabay / geralt
고대부터 시작된 기록물 수집, 로마에서는 자신의 부 과시 위한 장소로 만들기도
라디오-영화-TV 등장으로 위축됐으나 지속적인 재창조 과정 거쳐 오늘날까지...
웅장한 도심 건물에서부터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작은 공간에 이르기까지, 호주 전역의 공공도서관에서 우리는 3,750만 개 이상의 목록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는 책이나 잡지 등 물리적 항목만 있는 게 아니다. 공공도서관에서 제공되는 디지털 항목은 수백 만 개가 넘을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기타 자료 및 서비스가 있다.
우리 지역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이 기관은 그러나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텍스트를 수집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서관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Scotland) 역사학자인 앤드류 페테그리(Andrew Pettegree) 교수는 “(공공도서관에) 가서 빌리고자 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책에 무료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동료 역사학자인 아서 더 웨두웬(Arthur der Weduwen) 교수와 함께 ‘The Library: A Fragile History’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이 책에서 두 학자는 도서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탐구한다.
기록물 수집,
고대에서부터 시작돼
‘도서관, 그 취약한 역사’라는 저서에서 두 학자는 도서관의 역사를 중동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아시리아 제국의 왕족은 기록을 담은 점토 명판(clay tablets)을 대규모로 수집, 보관했다. 기원 전 7세기, 이 같은 점토 명판 보관소(오늘날의 도서관 개념) 중 하나는 3만 개 이상의 항목을 보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보관소에서는 오늘날의 도서관 카드 같은 것을 발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아무나 이용할 수 없으며, 보관된 점토 명판은 오로지 왕족과 학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고대, 점토 명판을 수집해 보관한 현대적 개념의 도서관은 시간이 지나면서 왕족이나 특권층이 즐기는 수집품 취미로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사진은 시드니 도심 인근, 그린스퀘어 공공도서관(Green Square Library)의 어린이 코너. 사진 : Landscape Australia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점토 명판은 훨씬 더 가벼운 양피지(parchment)나 파피루스(papyrus) 판으로 대체됐다. 이는 도서관 규모가 극적으로 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원 전 3세기, 이집트에는 거대한 규모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Library of Alexandria)이 문을 열었다. 또한 당시 엘리트 계층의 학자들에게는 50만 개의 두루마리(scroll)가 제공됐다.
고대 로마인들 또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페테그리 교수는 “그러나 이 시설은 일반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물’로 명성을 얻은 이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장소였다”고 말했다.
전 세계의 도서관들
페테그리 교수는 “또한 페르시아, 인도, 중국에서도 우아한 장식, 호화로운 색상, 뛰어난 서예로 장식된 훌륭한 필사본 수집이 황제나 왕세자들이 즐기는 취미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7세기 들어서는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코르도바, 카이로 등의 이슬람 통치자(caliph)들도 무슬림 세계에서 그 규모로 유명해진 도서관 항목들을 모았다.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마야문명과 아즈텍 문명에도 많은 도서와 기록물 보관소가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를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그런 한편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수도원은 중요한 자료나 텍스트를 손으로 복제할 수 있는 ‘필사실’(scriptorium) 또는 기록장소의 본거지가 됐다. 그리고 14, 15세기 들어 종이와 인쇄술의 발달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페테그리 교수는 “(종이와 인쇄기술은) 책을 소유하는 기쁨이 기관이나 고위층에서 마침내 개인 수집가의 손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책이 늘어나게 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도서관 역사에서 유일하게 일관성을 보인 것은 ‘비일관성’이었다”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문명 발전의 모든 단계를 거치면서 도서관은 성공과 성장의 패턴을 보인다.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거나 단순히 유행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수도원은 중요한 자료나 텍스트를 손으로 복제할 수 있는 필사실’(scriptorium) 또는 기록장소의 본거지가 됐다. 이어 종이와 인쇄술의 등장으로 도사관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다. 사진 : Unsplash
도서관 역사에서의 지각 변동
이어 페테그리 교수는 “1700년대에 와서 도서관에 지각변동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의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유료 회원으로 제한된 ‘회원제 대출 도서관’(subscription library) 또는 사립 도서관이 출현했다. 이 회원 전용 도서관은 미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에 따르면 이 대출 도서관에서는 여러 친구들이 모여 자기교육(self instruction) 또는 자기계발을 위한 서적뿐 아니라 오락용 소설을 읽곤 했다.
“이는 도서관이 단순히 학문의 도구라는 수준을 넘어 발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페테그리 교수는 “사람들은 책읽기를 레크리에이션, 휴식, 오락의 한 형태로 여기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공공도서관으로 이어진 근본적인 변화”라고 설명했다.
자선가로 변신한 ‘강철’ 남작
공공도서관은 1800년대 들어 더욱 발전했고 일부 자선가와 사업가들은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페테그리 교수에 따르면 초기 공공도서관의 대다수는 어떤 형태로든 부를 축적한 사업가들의 기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이런 가운데서 단연 꼽을 만한 사람으로 스코틀랜드 태생의 미국 ‘철강 남작’(steel baron)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를 언급하면서 “그는 도서관 사업에 약간의 로맨스를 가져 왔지만 무엇보다 그가 사업적으로 부를 이룰 수 있었던 명료한 (경영상의) 합리성을 도서관에 적용시켰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회원제 대출 도서관(subscription library)은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Pennsylvania)에 있다. 사진 : Internet Archive
카네기는 로마식 기둥, 내부 계단이 있는 웅장한 건물에 만들어진 ‘위대한 인물의 도서관’ 대신 지역사회에 한 명의 사서가 있는 단순한 건물의 도서관을 제공하고자 했다.
카네기는 “내가 당신 지역사회에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1만 달러를 주겠다. 대신 그 대가로 당신은 그것(도서관)을 유지하고 책과 직원을 제공하는 데 연간 1천 달러를 투입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철강 사업가는 이렇게 하여 미국, 영국, 캐나다 각 커뮤니티에 2,500개의 도서관을 제공했다.
페테그리 교수는 이 책(The Library: A Fragile History)에서 1880년대에서 1960년대를 ‘공공도서관의 위대한 시대’(the great age of the public library)라 칭했는데, 그런 시대를 연 이가 카네기였다.
이 기간,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공공도서관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 세계로 확산됐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수백만 권의 책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호주의 공공도서관
호주 최초의 공공도서관은 1854년 멜번에서 문을 연 ‘멜번 공공도서관’(Melbourne Public Library)이다. 오늘날 빅토리아 주립도서관(State Library Victoria)이 된 이곳은 또한 세계 최초의 무료 공공도서관 중 하나이다.
이 도서관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 ‘설립자들은 지식에 대한 접근이 시민사회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 믿었으며, 실제로 도서관을 시민대학(the people's university)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한 곳에 집합된 책읽기를 레크리에이션, 휴식, 오락의 한 수단으로 여기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공공도서관으로 이어진 근본적인 변화였다. 사진은 시드니 그린스퀘어 공공도서관(Green Square Library)의 한 구역. 시드니 시티(City of Sydney)가 가장 최근 선보인 도서관이다. 사진 : Landscape Australia
자신의 저서에서 페테그리 교수는 1970년대, ‘호주는 어떻게 진보적 사고가 책을 따라잡기 전, 세계를 따라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적시했던 최초의 국가들 중 하나’였는지를 언급했다.
당시 노동당 정부의 고프 휘틀럼(Gough Whitlam) 총리는 저명 사서인 알란 호턴(Allan Horton)씨에게 몇 가지 해결책을 내놓도록 지시했다. 호턴씨는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제시했다. ‘도서관의 훌륭한 친구입니다. 하지만 도서관이 각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권장하면 더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Libraries are great mate! But they could be greater, recommended that libraries should become community hubs).
호주의 도서관은 계속 성장, 발전했다. 지난 2019-20 회계연도 현황을 다룬 NSLA(National and State Libraries Australasia) 자료에 의하면 호주에는 1,600개 이상의 공공도서관 아울렛(지점, 이동도사관, 기타 유형 포함)이 있다.
그해 1년 동안 이들 공공도서관에서의 실제 항목(서적이나 기타 자료) 대출은 1억790만 건이 넘었고, 전자 컬렉션의 대출, 다운로드 및 검색은 3,400만 건 이상에 달했다.
이런 수치를 보면 호주인들은 도서관을 친근하게 여기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각 공공도서관에 등록된 회원 수는 930만 명 이상이다. 이는 전체 호주 인구의 36%에 달하는 수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서관
페테그리 교수는 “도서시대의 종말만큼 도서관 시대의 끝이 예상되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가 도서관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나는 많은 미래학자들보다 미래에 대해 덜 걱정한다”는 그는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과 같은 모든 발전에 따라 책과 도서관의 역할은 크게 줄었다”면서 “하지만 사실 이 새로운 것들은 책과의 시너지의 하나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페테그리 교수는 “공공도서관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혁신해 나가야 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사회와 관련이 있게 만들어나가야 한다”면서 “실제로, 이렇게 해 온 과정이 도서관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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