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합의 이행 ‘매뉴얼’
2022년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가 참석했다. 북한 최고 지도자가 남한 대통령 취임식 등 정부의 공식 행사에 참석한 건 처음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소개로 윤석열 대통령과 인사를 나눴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김 위원장의 부친인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난 적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풀었다. 이들 옆에선 김건희, 이설주 두 영부인이 김정숙 여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이어 갔다. 이 모습은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에 생중계로 전달됐다. 4년 전 판문점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봄을 서울에서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지난 4월 1일 만우절 아침에 해 본 상상이었다. ‘만약에’ 3번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가 순조롭게 풀렸다면 실제 가능하지 않았을까? 임기 중 한 번도 성사되기 어려운 남북 정상회담이 3차례 있었다.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김 위원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3차례 만났다. 이 중 한 번은 세 지도자가 함께 자리했다.
이 정도면 남북관계는 물론 북한과 미국의 관계도 확 풀렸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상회담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한은 중단했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재개했으며, 7차 핵실험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맞서 미 해군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이 4년 5개월 만에 동해에서 ‘경고성 무력시위’를 펼친다.
임기 중 북한에 대해 유화적이었던 문재인 정부도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전에 없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보수 성향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은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 단호한 태세를 보였다. 북한의 대남비난 수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러다 한반도에 매서운 ‘안보 한파(寒波)’가 들이닥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외교협상에서 대표적인 ‘톱-다운(top-down)’ 방식인 정상회담은 실무진들이 해결하지 못하거나 꽁꽁 묶인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한다. 최고 지도자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외교적 망신일 수 있다. 또 이들이 풀지 못하면 풀 방법이 없기에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반면 실무 협상을 시작해서 최고 지도자가 막판에 타결하는 ‘버텀-업(bottom-up)’ 방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난항을 겪을 때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접촉의 면이 넓다는 점에서 한 번 잘못됐다고 해도 협상 재개가 그리 어렵지 않다. ‘미운 정’도 들고 해서 서로에 대한 신뢰도 조금씩 쌓여 나간다. 이런 협상에선 극단적 파국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남북한 정부가 지난 1970년대 초 대화를 시작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지난 50년간 남북한은 5차례 정상회담을 포함해 수많은 회담을 통해 많은 합의를 이뤄냈다. 지난 1991년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는 서로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신뢰와 함께 교류협력을 거쳐 사실상 통일 단계까지 가는 과정에서 해야 할 일들을 망라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남북한이 이 합의서만 잘 이행했다면 만우절 아침에 했던 상상이 훨씬 전에 현실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남과 북은 그동안 각자 처한 대내외 상황을 핑계로 합의서 이행에 소홀했다. 어떻게 하면 합의서를 이행할까에 머리를 맞대기보다 남쪽은 정권의 치적을 위해, 북쪽은 내부 단결을 위해 남북회담과 합의를 이용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확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북한과 미국의 최고 지도자가 동시에 회담에 나섰는데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내실보다 포장에 더 신경을 쓴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보이고 감동을 줄까’에 매달리지 말고, ‘남북합의를 돌릴 수 없고 이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원칙과 규칙, 매뉴얼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어야 했다.
만약에 남북 정상이 매일 혹은 매주 직통전화로 대화하는 것을 합의하고 이행했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남북 합의서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차선, 차차선 대책을 마련하고 그걸 규정해놓았다면 극단의 최악은 피할 수 있다. ‘누구도 못한 걸 해냈다’고 자랑만 하지 말고 그걸 실행하거나 지켜가는 방안 마련에 고민했어야 했다.
오십이 넘은 ‘남북이’가 여전히 즉흥적이고 자기 말이나 약속을 어기는, 어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건 합의를 어떻게 진행해 나가고 결렬되면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지 등의 매뉴얼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인 지금이 바로 그간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남북이 매뉴얼 만들기’를 할 수 있을 때일지도 모른다.
김인구 / 세계한인언론인협회 편집위원장
전 호주 <한국신문> 편집인
gginko7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