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하 지사가 서거 62년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 품에 안겼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프랑스 땅에서 영면에 들었던 홍재하 지사(1892∼1960)의 유해가 마침내 국내로 봉환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15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서측 행사용 주차장에서 이한호 지사와 홍재하 지사의 유해봉환식을 거행했다.
'자나깨나 내 가슴 속, 나의사랑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봉환식에는 유족(17명), 광복회원, 학생, 박민식 보훈처장, 주한스위스대사, 주한프랑스대사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봉환식은 추모편지 낭독, 영현 운구, 묵념, 헌화 및 분향, 건국훈장 헌정, 봉환사, 추모 공연, 영현 봉송 등으로 진행됐다. 이어 박민식 보훈처장이 2019년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을 두 지사의 유해가 담긴 소관에 헌정했다.
스위스에서 이송돼온 이한호 지사(1895∼1960)도 홍 지사와 함께했다. 16일 오전 10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서 유해 안장식이 엄수된 후, 두 지사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안장됐다.
홍 지사의 유해 봉환은 국가보훈처의 ‘국외거주 독립유공자’ 본국 봉환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프랑스대사관과 프랑스한인회가 지난 3월부터 국가보훈처(예우정책과)와 계속해서 유해 본국 봉환에 대해 논의해 왔고 8개월여 만에 결실을 맺게됐다.
홍재하 지사(1892~1960)는 러시아(무르만스크)와 영국(에딘버러)을 거쳐 1919년 프랑스 쉬이프(Suippes, 파리 동쪽 차량 2시간 30분 거리)에 정착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했다.
지사는 당시 복구사업에 참여한 한인들과 함께 임금의 일부를 모아(총 6,000프랑)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서기장 황기환)에 전달하였으며, 1920년에는 유럽지역 한인 약 50여 명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홍재하 지사의 유족(차남)인 ‘장 자크 홍푸안’씨가 보관하고 있던 홍재하 지사의 각종 사진 및 서신 자료를 지역 교민들이 정리하여 2018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전달하였는데, 이 자료 중에는 당시 파리위원부 서기장이었던 황기환 지사가 홍재하 지사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해 주어 감사하다’는 서한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편, 홍재하 지사는 1919년 프랑스 최초이자 유럽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제2대 회장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홍재하 지사는 해방만 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부푼 희망을 갖고 살아왔고, 해방 후에는 매년 8.15 광복절에 집에 태극기를 달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홍재하 지사는 1960년 콜롱브(Colombes) 자택에서 평생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타계하였으며 머나 먼 프랑스 땅에 묻혔다.
한편 이한호 지사는 1919년 중국 간도지역에 설립된 학생 중심의 항일운동 단체 맹호단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에도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선수단장 및 1954년 초대 서독 총영사로서 대한민국 발전에 헌신했다.
이 지사가 한성 기독교청년회(YMCA) 재임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영어를 배운 인연으로, 이 전 대통령이 1933년 스위스를 찾았을 때 외교적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홍재하 지사, 프랑스 쉬이프(Suippes)市에 첫 정착
쉬이프시는 세계 제1차 대전 최대 격전지인 베르덩 인근 지역으로 홍재하 지사(1898~1960)가 프랑스에 최초로 정착한 도시이며, 그 당시 이주 한인 다수가 1차 대전 戰後복구사업을 위해 전사자 수습 및 복구 작업 등을 실시하였다.
1919년 10월~1920년 2월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약 35명의 한인들이 쉬이프시에 정착하여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11월, 홍재하 지사를 포함하여 근로자 35명이 샬롱-쉬르-마른(Châlons-sur-Marne) 데파트망에 도착하여, 쉬이프 시의 폐허 지역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다.
마른느(Marne) 데파트망 고문서관에 소장된 ‘1920년 외국인 명부’는 당시 프랑스 경찰청이 발급한 체류증을 교부하면서 작성된 것이다.
이 명부에는 당시 복구사업에 투입된 한인 43명의 이름, 생년월일, 출생지와 거주지, 프랑스 도착일자, 체류증 발급날짜 등의 인적사항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이들의 국적을 한국인(Coréen)이라고 표기하였고, 이 명부에 있는 ‘인 지용 푸앙(In Chiyon Fuan)이 바로 홍재하 지사다.
한인 노동자들은 쉬이프 시에서 1~2년간 일한 후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 삶의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1년 3월 프랑스 인구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쉬이프 시 거주 한국인은 1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럽 최초 한인회, 재법 한국민회(1919.11.)를 이끈 홍재하 지사
홍재하 지사는 황기환(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및 허정(許政,1896~1988)과 함께 1919년 11월 재법 한국민회 (在法 韓國民會)를 결성하였으며, 홍재하 지사는 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 1919년 3월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활동이 시작됨.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제1대 프랑스한인회장은 ’허정’이었다는 의견도 있음.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法’은 프랑스의 중국식 표현)는 프랑스 한인회의 시조(始組)로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최초의 한인 단체이자 최초의 한인 이민자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독립운동자금 전달
홍재하 지사는 1919년 12월 첫 급료를 받을 때부터 당시 한인 노동자들과 함께 모금을 시작하여 6개월 동안 6천 프랑의 독립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전달하였다.
당시 전후 복구작업을 하던 한인 약 30여 명이 매월 1,000프랑 정도를 모은 것인데, 이것은 1인당 매월 35프랑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당시 파리위원부 서기장이었던 황기환 지사가 홍재하 지사 앞으로 보낸 감사편지에 따르면 재법 한국민회가 1919년 11월 19일 결성된 직후부터 1920년 5월 18일까지 6개월간 총 6,000프랑을 전달한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재법 한국민회는 1920년 3월 1일 유럽각지의 한인들을 초청하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다.
당시 신문인 <신한민보>에 따르면, 기념식에는 한인노동자 및 프랑스 유학생 10여 명, 영국 런던에서 온 일가족 10여 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 등 총 50여 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유로 쉬이프시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정신이 깃든 역사적인 장소로 평가되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프랑스 한인회는 매년 11월 11일 쉬이프시에서 주관하는 1차대전 종전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차남 ‘장 자크 홍푸안’을 안고 기뻐하는 홍재하 지사
【프랑스(파리)=한위클리】이석수 기자